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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영웅’된 미화원 아들…4108회 강하 기록 세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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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현역 장병 최다 강하 특전사 김임수 원사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김임수(51) 원사를 만난 것은 ‘군이 자랑하는 낙하산 영웅’이기에 앞서 그의 인생 얘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위안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고졸인 그는 월남 참전 용사인 아버지가 미화원 등으로 일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하는 가운데 자란 데다 체질도 약골이었다, 흙수저의 요건을 죄다 갖춘 그는 그러나 군 생활 31년간 4108회를 강하해 현역 장병 최다 기록을 세웠다. 국군의 날 시범 강하 25번, 경연대회 45회 입상 기록도 달성했다.

“어렵게 특전사에 들어왔는데 제가 너무 초라한 겁니다. 그래서 매일 장거리를 달리고 남들보다 1시간 먼저 일어나 훈련했죠. 그런 생활만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꼭대기에 있더군요. 거창한 변화를 원하지 않고 할 일 착실히 하면 시간의 문제이지 언젠가는 인정받을 거라 믿으며 살았는데, 맞은 것 같습니다.”

‘초라한 자신’ 극복하려 맹훈련
각종 경연대회 45번이나 입상
1200m 낙하해 동전 찍는 묘기도
“착실한 하루가 톱에 오른 비결”

체력시험 고전…읍소해 특전사 입대

훈련 현장에서 강하복 차림으로 포즈를 취한 김임수 원사. 그의 가슴엔 강하 1000회 이상 기록 대원에게 수여되는 황금색 금성월계휘장이 부착돼있다. 1993년 육군 부사관 (모병 24기)로 입대한 그는 은퇴를 3년 남긴 올해에도 5회의 강하를 계획하고 있다. [사진 특전사]

훈련 현장에서 강하복 차림으로 포즈를 취한 김임수 원사. 그의 가슴엔 강하 1000회 이상 기록 대원에게 수여되는 황금색 금성월계휘장이 부착돼있다. 1993년 육군 부사관 (모병 24기)로 입대한 그는 은퇴를 3년 남긴 올해에도 5회의 강하를 계획하고 있다. [사진 특전사]

성장사가 궁금합니다.
“1992년 전주 우석고를 졸업한 뒤 해양학도를 꿈꾸며 대입 고사를 봤는데 점수가 낮아 포기해야 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로 국가유공자인 아버지는 해병대 출신인데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 3남 1녀(김 원사는 차남)를 부양하셨어요. 마지막 일자리가 환경미화원이셨죠. 집이 어려우니 재수는 언감생심이었고, ‘군대 먼저 다녀오자’고 마음먹었죠. 마침 특전사 나온 동네 형이 ‘남자라면 가볼 만한 곳’이라고 권해요.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어머니 반대를 무릅쓰고 지원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특전사는 북한에 침투해 작전하는, 무시무시한 부대로 소문났어요. 약골이라 체력시험에서 고전해서 모병관한테 ‘꼭 가고 싶다’고 읍소한 끝에 어렵게 합격했습니다. 펜글씨를 잘 썼는데 마침 강하 부대인 707 특임대에서 행정 하사를 필요로 해 선발된 끝에 7주간 교육받고 시험을 봤어요. 생명줄 없이 자유 낙하하는 ‘고공 강하’를 3번 안에 통과해야 하는데 두 번 떨어지고 마지막 시도에서 겨우 합격했죠.”
기분이 어떠셨어요?
“1만 피트(3048m) 상공에서 맨몸으로 떨어지면 순간 속도가 시속 300㎞에 달합니다. 처음 강하할 땐 ‘목숨을 그냥 내던지는 거네’라고 생각했어요. 그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순전히 반복 훈련으로 극복하는 것이죠. 지상에서 수천번 연습하고 강하 한 번을 하거든요. 항공기 이탈 12초 뒤엔 가속이 떨어져 시속 140㎞로 유지됩니다. 그때 자세를 안정시킵니다. 이어 손목에 찬 고도계를 보다가 4000피트(1219m)에 도달하면 손잡이를 당겨 낙하산을 펴면 ‘확!’ 솟구치죠. 진짜 승부는 고고도 강하입니다.”

손끝 찢어지는 맹추위 속 50㎞ 활공

고고도 강하라니요?
“은밀한 침투를 위해 지상에서 탐지가 안 되는 고도 2만5000피트(7620m)에서 강하하는 거죠. 산소량이 지상의 3분의 1이라 산소마스크가 필수입니다. 기온도 지상보다 섭씨 50도쯤 낮으니 겨울에는 영하 50~60도가 기본이죠. 풍속도 시속 70노트(130㎞)에 달해요. 장갑을 껴도 손끝이 찢어질 만큼 춥습니다. 낙하산이 20㎏인데 군장 50㎏까지 추가되니 몸도 무겁죠. 새벽에 민항기 안 뜨는 시간대에 강하하는데, 2월이 피크입니다. 체공 시간 5~8분 동안 근 50㎞를 활공해요. 서해에 강하하면 개성에 착지할 수도 있습니다. 주로 군산 앞바다에서 뛰어 익산에 착지하죠.”
대단합니다.
“가장 많이 할 때는 1년에 300회씩 했죠. 하루에 10번 한 적도 있어요. 그땐 저도 녹다운됐죠. 고도의 정신력이 요구돼 일반인들은 하루 2번도 힘듭니다. 대통령 등 VIP들 앞에서 펼치는 시범 강하만 3000번쯤 했어요. 국제 시합 강하도 많이 했는데, ‘정밀 강하’라고 4000피트에서 낙하해 땅에 놓인 지름 1.5㎝ 동전을 터치해 점수를 따는 겁니다.”
세상에…. 4000피트에서 낙하해 동전에 접지하는 비결은요?
“표적을 찍으려는 욕심부터 버려야 해요.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의 극기 훈련을 따라 해요. 아무도 없고 모르는 산길을 홀로 4시간 걸어 목표지점까지 가고, 달리는 말에서 활 쏘는 상황을 연출해 평정심과 배포를 기릅니다.”

거센 바람에 한강에 착지한 적도

낙하산 안 펴진 적은 없나요?
“예비 낙하산을 딱 두 번 펴봤어요. 한 번은 전개낭이 잘못돼 낙하산이 안 펴져 예비 낙하산을 폈고, 두 번째는 낙하 대형 만들다 엉켜서 예비 낙하산 폈죠. (낭이 안 풀어졌을 때 기분은요?) 배운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맨 처음 내가 배운 게 뭐였지 생각하면서…. 먼저 낭을 흔들어보고 펴지도록 시도하죠. 그게 안 되면 손잡이를 당겨 예비 낙하산을 피는 거죠. 그 연습도 수만번 했어요. 상황이 발생하면 머리 이전에 몸이 움직이게 하는 거죠. (예비 낙하산마저 안 펴지면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 번도 다친 적이 없는 것으로 들었는데요.
“착지할 때 무리하게 서면 안 되고 몸을 굴러 충격을 완화하란 원칙을 늘 지킨 덕분이죠. 미사리에서 강하하다가 바람이 워낙 세 당초 착지점 대신 한강 한가운데 섬에 내렸다가, 대기하던 보트로 빠져나온 적은 있어요. 극도의 스트레스는 따로 있습니다. 강하 시범에서 화려한 모습을 만들려고 대원들끼리 연결한 와이어가 드물게 엉켜 안 풀릴 때가 있어요. 그러면 엉킨 두 사람이 함께 추락하죠. 100번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이런 사고가 터지면 최악은 사망이죠. 동료들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을 땐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는 고뇌로 괴로웠습니다.”
북한에서 3월 15일 김정은이 참관한 공수부대 강하 도중 사상자가 여럿 나왔다고 하던데요?
“낙하산이 기상에 민감하거든요. 바람이 세거나 구름의 고도가 높으면 강하를 취소해야 하지만 북한은 김정은 때문에 강행한 결과 대형사고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풍속이 가장 문제였을 겁니다. 우리 군은 시속 17노트(31㎞) 넘으면 취소하는데, 거기는 시속 20노트(37㎞) 이상인데도 강하한 것 같아요. 그러면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가고, 낙하산끼리 엉키면서 예비 낙하산조차 펴지지 않아 추락해 숨지는 거죠.”
미군들하고도 훈련해 보았습니까?
“그럼요! 미국에 7번 다녀왔는데 미군들이 ‘한국군 대단하다’고 해요. 그들은 시범 강하 때 고도 2000피트 지점에서 대원들이 분산하는데 우리는 1000피트까지 대형을 유지하거든요. 미국 외엔 우리처럼 강도 높게 강하하는 나라는 없어요.”
그는 50대 초반이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군살 없는 근육질이다. 비결을 물었다.
“술을 입에 안 대고, 배부르게 안 먹어요. 매일 새벽 5시 출근해 7㎞를 달리고 스쿼트·데드리프트 등 근력 운동을 1시간 반 합니다. (쉬고 싶은 날도 있을 텐데요.) 없다면 거짓말이죠. 그러나 강하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가급적 매일 운동하며 한계 지점에서 더 강도를 높입니다.”

부인도 강하 베테랑…특전사 잉꼬부부

어떤 때 보람을 느끼나요?
“말 한마디로 사람 살렸을 때죠. 한 후배가 이탈 직전 낙하산 개방 손잡이가 뒤로 넘어가 있는 걸 보고 제자리에 끼우도록 했죠. 낙하산 못 펴고 추락할 수 있거든요. 나중에 후배가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고 하더군요. 사소한 절차 하나라도 생략하려는 후배를 보면 ‘안 돼! 다시!’라며 챙기도록 하죠.”
학벌 등 불이익을 당한 적 없나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학벌이나 지연이 좌지우지하는 곳이었다면 진작 그만뒀을 겁니다. (군이 좋은 조직이네요.) 네, 자기가 한 만큼 인정받는 곳이 군대예요. 천신만고 끝에 특전사에 합격해 들어왔는데 약골인 제가 너무 초라한 겁니다. 그래서 하루 20㎞씩 뛰었어요. 이것도 못한다면 패배자가 될 것이란 생각에 극한으로 몰아붙였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꼭대기에 올라왔어요. 2년 차 때 처음 국제시합에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예선에서 탈락했어요. 너무 출전하고 싶어 다음날부터 새벽 5시에 훈련장에 나와 뛰었습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대장님(소령)이 보시고 예비선수로 등록시켜주더군요. 그걸 계기로 강하 실력이 일취월장했죠.”

김 원사의 부인 박철순(50) 원사도 고공 강하 베테랑이다. 부부는 29년째 특전사에서 함께 근무해오고 있다. 부인의 말이다.“1995년 특전사에 들어가 1년 먼저 와 있던 남편과 훈련을 같이했어요. 낙하산 정리같이 궂은일을 솔선수범하고, 후배들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에 반했죠. 99년 국군 최초로 고공 강하 결혼식을 했는데, 두 팔 맞잡고 하늘에서 키스신을 연출했죠.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