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EU 거액 반도체 보조금 뿌리는데…부랴부랴 ‘10조 금융지원’ 꺼내든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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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반도체 패권을 쥐기 위해 세계 주요국이 ‘쩐의 전쟁’에 나선 가운데 한국 정부도 10조원 규모의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업계에선 일단 반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현금성 보조금 지급이 빠지고 세제·금융지원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건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14일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팹리스·제조시설 등의 설비투자 및 연구개발(R&D)을 위해 10조원 이상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방식은 보조금 지급 대신 세제·금융지원을 강화하는 쪽이다. KDB산업은행 등을 통해 저리 대출·보증을 확대하고 민관 공동 출자 펀드를 조성해 설비투자와 연구개발(R&D)을 지원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중국·일본 등과 달리 현금성 보조금 지급은 빠져있어 “실탄이 빠진 격”이라고 비판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리로 대출을 지원하는 금융정책은 이미 기반을 잡은 기업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초기 투자를 해야 하는 기업엔 실효성이 떨어진다”라고 말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국내 소부장·팹리스 기업들은 현금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조금 형태의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세계 주요국은 앞다퉈 보조금 지급책을 꺼내 들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칩스법)에 따라 올해 인텔(85억 달러)과 대만 TSMC(66억 달러), 삼성전자(64억 달러) 등에 총 390억 달러(53조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유럽연합(EU)에선 현재 독일(183억 달러)과 프랑스(31억 달러), 네덜란드(27억 달러) 등이 총 241억 달러(33조원)가량의 보조금을 뿌린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TSMC 제1·2공장에 최대 1조2000억엔(약 10조5000억원)가량의 보조금을, 도요타·NTT 등 자국 대기업들이 협력해 만든 라피더스에는 9200억엔(약 8조10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민희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 정부의 10조원 지원은 규모로 봤을 때나 지원 방법으로 봤을 때나 주요국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지원을 통해 소재·부품·장비, 팹리스(반도체 설계), 제조시설 등 반도체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반도체 기초체력을 강화하면서 시스템반도체, 반도체 후공정 등 상대적 취약 분야도 키우겠다는 계획이다. 이런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도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이미 한국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제조 기반 시설이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처럼 보조금을 주면서까지 기업을 유치할 필요성이 없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나라 곳간도 녹록지 않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R&D 지원과 함께 기업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세제를 지원하고 취약한 부분을 중심으로 재정을 쓰는 게 기본원칙”이라며 반도체 후공정 분야에 투자를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보조금 지급 대신 세액공제를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올해 종료 예정인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공제 일몰 연장과 국가전략기술 R&D·통합투자 세액공제 범위 확대를 검토 중이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보조금 지원 대신 세액공제를 높이면 유사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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