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후추탕(胡辣湯)과 중국 후추 흥망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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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라탕(胡辣湯), 고기완자, 감자, 버섯 등을 후추와 화쟈오로 맛을 낸 스튜와 비슷한 형태의 중국 음식. 바이두(百度)

후라탕(胡辣湯), 고기완자, 감자, 버섯 등을 후추와 화쟈오로 맛을 낸 스튜와 비슷한 형태의 중국 음식. 바이두(百度)

후라탕(胡辣湯)이라는 음식이 있다. 후추(胡椒)와 약간의 고추(辣椒) 그리고 얼얼한 맛을 내는 화쟈오(花椒)가 들어가기도 하고 안 들어가기도 한다. 탕이라고 하니까 얼핏 국 같은 느낌이지만 실은 걸쭉한 스튜(stew) 내지는 묽은 죽에 가깝다.

대부분 한국인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중국 음식이지만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된 적이 있어 아는 사람도 꽤 있다. 어쨌든 부연해서 말하자면 후추와 고추 등을 전분과 함께 끓인 후 다시 갈아놓은 고기나 감자, 버섯, 땅콩 등을 건더기로 넣어 진한 수프처럼 만든다. 주로 아침 식사로 먹는데 중국식 소 없는 찐빵인 만터우나 꽈배기인 유탸오(油條)등을 곁들여 먹는다. 고대 중국 왕조의 도읍지였던 허난성 정저우나 산시성 시안 등지에서 발달해 유행한 음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좀 특이하다. 후추는 맵고 자극적인 데다 향까지 강해 요리할 때 조미료로 살짝 뿌리기에는 어울려도 상당량을 넣어 수프로 먹기에는 부담이 갈 것 같은데 중국 사람들 왜 후추로 수프인 탕을 만들어 먹을 생각을 했을까?

게다가 언제부터 후라탕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근대 이전까지 서양에서는 후추 가격이 같은 무게의 금값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다. 그래서 후추를 보다 싸게 구하려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까지 올 정도였는데

옛날 중국은 후추가 얼마나 흔했기에 탕까지 끓여 먹었던 것일까?

비교적 많이 알려진 서양의 후추 전래 역사와 달리 동양의 후추 전파 역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중국에 후추가 퍼진 과정을 보면 앞서의 의문 해소와 더불어 흥미로운 중국 음식문화와 경제사를 알 수 있다.

먼저 후추탕이 생긴 시기와 유래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모두 근거는 없는, 떠도는 소문이지만 어쨌든 하나는 12세기 초 송나라 휘종 때 생겨난 요리라는 것이다. 도사들이 모여 도를 닦는 무당산에서 전해지는 요리 비법을 궁중 요리사가 전수받아 후추탕을 만들어 황제에게 바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16세기 후반 명나라 가정제 때 황제가 즐겨 먹던 요리를 궁중 요리사가 비법을 빼내 민간에 퍼트린 것이 원조라는 것이다. 참고로 가정제는 불로장생을 추구하며 신선이 먹는 단약(丹藥) 만들기에 몰두해 정사를 돌보지 않았던 군주다.

두 이야기의 핵심은 후추가 늙지도 않고 그래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신선의 삶을 추구하는 도사들의 믿음, 즉 도교의 속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송 휘종 때는 깊은 산중 비법을 전수받아 황제의 요리로 만든 만큼 후추가 귀하고 소중했다는 것이고 명나라 가정제 때는 궁중요리 비법을 민간에 퍼트렸으니 후추가 그만큼 대중화됐다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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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옛날 중국 도사들은 왜 후추를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신선의 단약이라고 생각했을까? 이유는 옛날 중국에서는 후추를 구하기 힘들었고 값이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인데 후추의 가치가 그토록 높았던 것은 엉뚱하게 후추를 로마제국,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에서 수입했기 때문이다.

설마 싶지만, 중국 역사서에 그렇게 기록돼 있다. 『후한서』「서역전」에는 후추가 대진국(大秦)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대진국은 옛날 중국에서 로마제국을 부르던 명칭이다. 『위서』 『수서』 『구당서』 등에서는 또 후추가 파사국(波斯國)에서 나온다고 했다. 파사국은 페르시아 제국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당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후추를 서역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아시아의 향신료인 후추를 왜 이렇게 황당한 경로를 통해 들여왔을까 싶지만, 이유가 있다. 후추 주요 산지는 말레이반도이고 최종 집산지가 인도 서남부 케랄라 항이다. 이곳에서 아랍을 거쳐 로마제국, 유럽으로 전해졌다.

반면 중국은 아직 남월이라고 불렀던 광둥으로는 세력이 못 미쳤고 따라서 해상루트를 통해 동남아로 직접 연결되지 못했다. 그리고 인도와는 히말라야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이 가로막아 직접 교역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멀리 로마와 페르시아를 거쳐 후추가 수입됐던 것이니 불로장생약으로 여겨질 만큼 귀했던 것이다.

이랬던 중국에 후추가 쏟아져 들어온 것은 1405년 영락제의 명에 따라 정화함대가 동남아 항로 개척에 나선 이후부터다. 모두 7차례의 정화함대 원정 과정에서 그 귀했던 후추가 이제는 동남아 루트를 통해 중국으로 직접 전해진다.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지 후추는 명나라 초기 재정 안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심지어 조정에서는 관리의 급여를 당시 처음 발행된 지폐나 곡물 대신 후추로 지급했을 정도다.

그러니 귀한 향신료였던 후추가 시중에 무더기로 풀리면서 가격이 폭락했다. 명 가정황제 때 후추탕이 대중화됐다는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다. 한편 초기 재정 안정에 기여했던 후추는 명나라 후반에는 물가 불안정의 원인이 됐고 환관과 관리들이 이권을 놓고 다투면서 명나라 쇠락의 촉매제가 됐다. 후추로 만든 후라탕을 통해 본 중국 후추 흥망사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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