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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맘대로 월계관 씌웠더니…김수환 뜻밖의 한마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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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최종태 1992년작 ‘생각하는 여인’

이건희·홍라희 마스터피스

2022년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서 국보 ‘일광삼존상’과 나란히 전시된 조각 ‘생각하는 여인’ 이야기입니다. 평생 ‘반가사유상’의 미(美)를 추구한 조각가 최종태의 이야기입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지만 길상사에 관음상을 세웠듯 그의 조각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최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 작품 157점을 기증했습니다.

서울 연남동 자택에 딸린 작업실의 최종태(92)가 이날 새벽 막 완성한 성모자상 옆에 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연남동 자택에 딸린 작업실의 최종태(92)가 이날 새벽 막 완성한 성모자상 옆에 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반가사유상 같은 조각을 만들고 싶었어. 흙 붙여 놓고는 너무 닮았으면 어쩌나 해서 국립박물관에 달려갔지. 보고선 ‘아, 괜찮겠다’ 하고 안도했어.”

최종태(92)가 돌아본 바로 그 조각은 ‘생각하는 여인’(1992)이다. 202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서 국보 ‘일광삼존상(삼국시대·6세기)’과 나란히 전시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전국의 성당 곳곳에 성모상을 남긴 그는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관음상도 만들었다. 그의 관음상은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선 권진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전시되기도 했다.

작품에서 종교 간 화합을 이룬 그는 최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 작품 157점을 기증했다. 부활절(3월 31일)을 앞두고 서울 연남동 그의 자택을 찾아갔다. 이날도 새벽 4시부터 작업실에 있었다는 그는 “가슴에 안 차니 더, 더, 하던 게 평생이 됐다”고 말했다. 그런데 답답하다기보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서있는 사람’(198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서있는 사람’(198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만족이 안 되니까, 어딘가 섭섭한 게 있으니까 또 만드는 거여. 그 하나, 완벽한 하나를 못 만들어. 그건 하느님이나 만들지 인간은 못 만들어. 그러니까 계속하는 거여, 안 되니까. 가슴에 안 차니까 더, 더, 하는 거지. 이상하게 그렇게 속상하진 않아.”

그는 전쟁 통인 1952년 대전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년 반 학비를 모아 스물두 살에 서울대 조소과에 들어갔다. 거기서 김종영(1915~82), 장욱진(1917~90) 선생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여인상에 본격 매진한 것은 1965년 당시 국립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을 만난 이후부터다.

‘서 있는 사람’(1980)은 일찌감치 이건희 자택에 들어갔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온 화랑 관계자가 이 작품을 보고는 “이 사람이면 되겠다” 한 것이 인연이 돼 1985년 파리의 국제아트페어 피악(FIAC)에 나갔다. 한국 첫 참가(가나아트)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의 소녀상에 슬픈 기가 있다고 했다. 식민지·전쟁…. 어렵게 살아서 그런가. 반가사유상 같은 미소를 만들고 싶었다. 슬픈 기운을 걷어내는 데 한참이 걸렸다.

‘생각하는 여인’(1992)을 만들 때도 그랬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내리감은 여인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발을 올렸다. 반가사유의 자세다. 그러나 오른팔을 붙든 왼손, 굽고 납작한 상체, 왜곡된 비례와 전신에 거칠게 파인 홈이 외려 현대적이다. 선이 단순해지니 표정은 깊어지고, 염원은 강렬해진다.

반가사유상을 떠올리며 만들었던 ‘생각하는 여인’(1992).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반가사유상을 떠올리며 만들었던 ‘생각하는 여인’(1992).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최종태는 소래의 성 바오로 피정의 집에 ‘십자가의 길’을 만들던 때를 말했다. 첫 장면, 사형 선고를 받는 예수의 모습에 그는 가시 면류관 대신 월계수를 붙였다. 마침 거기서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을 만났다. “실은 제가 가시관을 했다가 마음에 안 들어 월계수로 바꿨습니다. 잘못한 것 아닙니까” 물었다. 추기경은 “이분은 승리가 예고된 사형수다. 그러니 미리 갖다 붙인 게 뭐가 잘못이겠나”라고 답했다.

“그때 추기경이 ‘글쎄…’라고만 했어도 나는 다시 고쳤겠지. 앞으로 성상을 조각할 때마다 ‘이게 맞나’ 걱정이 앞섰겠지. 그런 마음을 추기경이 싹 잘라준 거여. 그게 지도자여.”

법정(1932~2010) 스님도 그랬다. 가톨릭 신자인 그가 관음상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말에 가타부타 없이 맡겼다. 관음상의 도상에 충실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추기경도 스님도 갔지만 면류관 대신 월계관 쓴 예수도, 성모상 닮은 관음상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학창 시절의 스승도, 세상에서 만난 스승도 모두 떠나고 나니 “등 뒤에 기대고 있던 게 없어진 양 허전하다”고 했다. 다 배운 뒤 거기서 벗어나는 게 예술가의 일. 미술사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평생이 걸렸다. “그전에는 이렇게 그리면 마티스가 들어 있고, 거기 피카소가 들어가고 했는데 이제는 없어졌어. 마음대로 하는 데 90년 걸렸어”라며 웃는다. 승리의 미소다.

조각가 중 자코메티를 가장 좋아한다는 최종태는 “영원이 담긴 형상을 하고 싶다, 영원이 곧 하느님”이라고 말했다. 교회 조각의 토착화, 불교 조각의 현대화에 앞장서며 보편을 지향해 온 그의 작품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최종태 기증전시실’에서 관객과 무료로 만나고 있다. 전시의 제목은 ‘영원을 담는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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