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전 세계에서 700만명이 찾는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하 메트). 지난해 말 이곳 한국실에 새 그림이 걸렸습니다. 백남순(1904~94)의 1936년작 ‘낙원’입니다. 한국실 개관 25주년 특별전 ‘계보: 메트로폴리탄의 한국 미술’에 출품된 거죠.
이건희ㆍ홍라희 마스터피스④
백남순은 20세기의 노마드였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도쿄ㆍ파리에서 공부했고, 만년은 뉴욕에서 보냈습니다. 고국에선 사실상 잊혀진 화가였습니다. ‘낙원’도 비슷합니다. 78년 동안 많은 곳을 떠돈 끝에, 뉴욕에 와서 세계인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백남순과 ‘낙원’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메트 현수아 큐레이터는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서 ‘낙원’을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이번 주 ‘이건희ㆍ홍라희 마스터피스’는 ‘계보: 메트의 한국 미술’이 엄선한 30점 가운데 단 한 점의 이건희 컬렉션, 백남순의 ‘낙원’을 소개합니다.
목차
1.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린 이건희 컬렉션 ‘낙원’
2. 보스턴 마라톤 손기정ㆍ서윤복의 재정보증인, 백남용의 동생
3. 파리의 첫 여성 미술 유학생, 부부 화가
4. 평북 오산학교에서 15년…‘이중섭의 스승’
5. “오늘은 꼭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부속. 결혼선물로 보낸 덕에 살아남은 그림, ‘낙원’ 발굴기
1.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린 이건희 컬렉션 ‘낙원’
캔버스 천으로 짠 8폭 병풍이다. 화가는 여기 표구라도 한 듯 테두리까지 그려 넣었다. 병풍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본다. 맨 오른쪽 낙원 입구에 결혼 서약을 하듯 남녀가 서 있다. 폭포수 쏟아지는 낙원으로 들어간 여자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남자는 고기잡이를 한다. 서로 보듬고 성장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리라 기원하는 것 같다. 쏟아지는 폭포수와 야자수, 험산 준령과 푸른 초원, 누드의 인물과 서양식 집…. 맨 왼쪽 위에 영어 서명이 있다. ‘N.S.Paik’.
동서양의 이상향이 뒤섞인 기묘하고 신비로운 그림이다. 조선의 화원이었다면 ‘몽유도원도’나 ‘무이구곡도’를, 17세기 유럽의 화가라면 아르카디아를 그렸을 텐데.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의 몇 안 되는 파리 유학파 화가 백남순은 병풍 캔버스에 하이브리드 낙원을 그렸다.
메트 한국실은 ‘낙원’ 옆에 16세기 ‘계회도(契會圖)’를 걸었다. 같은 해 태어나 비슷한 시기 과거에 급제한 사대부들이 환갑에 모여 함께 시를 지으며 남긴 그림이다. 미국서 나고 자란 현수아 큐레이터는 “일제 강점기에 파리 유학을 하고, 후에 미국에 이민 온 백남순의 이야기에 끌렸다”며 “조선시대 이상향을 묘사한 ‘계회도’와 20세기 백남순의 유토피아 풍경화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여겨 함께 걸었다”고 설명했다. 백남순은 ‘낙원’에 어떤 소망을 담았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