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의 대표작은 국보 ‘인왕제색도’죠. 국보급 서화는 훼손을 막기 위해 전시기간에 제한을 두고 다른 작품과 바꿔 겁니다. 202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마련한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 ‘인왕제색도’와 번갈아 전시된 그림이 박대성(79)의 ‘불국설경(佛國雪景)’입니다. 23만 명 가까운 관객이 몰린 전시였죠.
이건희ㆍ홍라희 마스터피스
박대성(79)은 이건희(1942~2020) 회장과의 기억을 가진 몇 안 되는 생존 화가입니다. 1988년 이 회장과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요. 권근영 기자가 박대성의 경주 화실로 찾아갔습니다. 권 기자는 이불ㆍ서도호ㆍ양혜규ㆍ정연두 등 한국 미술을 이끄는 작가들과의 인터뷰집 『나는 예술가다』, 여성 미술가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 『완전한 이름』을 썼습니다.
②“집무실에 걸 그림 그려 달라”…‘이건희 전속 화가’ 박대성의 ‘불국설경’
」
“존경합니다.”
1988년 4월,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28층 집무실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은 세 살 아래의 한국화가 박대성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화가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왜요?”
“뭐든 상위 1~2%까지 오르는 사람이라면 제겐 존경의 대상입니다. 강도일지라도요. ”
“삼년상이 지나면 집무실을 바꿀 겁니다. 그때 그림을 그려 주세요.”
이병철(1910~87) 삼성 창업회장이 세상을 뜬 지 반년 뒤였다. 달항아리가 놓인 집무실에서 이건희는 새 그림을 주문했다. 후에 박대성은 금강산도를 그려 보냈다. 가늘고 긴 종이 위에 금강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그림이었다. 박대성은 그렇게 ‘이건희의 전속 화가’가 됐다. 정기적으로 그림을 그려 보냈고, 4년쯤 뒤 스스로 더는 못 그리겠다고 할 때까지 후원이 이어졌다.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박대성도 이건희에게 청을 하나 했다. “중국에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입니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 전이었다. 삼성물산 홍콩지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건희는 여비까지 챙겨줬다.
이건희와 처음 만난 때 박대성은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마친 참이었다. 1984년 서울 순화동 중앙일보 사옥에 개관한 호암갤러리는 ‘아르누보 유리명품전’으로 시작해 ‘조선백자전’까지 굵직한 전시를 이어갔지만 호응이 기대에 못 미쳤다.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던 중 서울대 출신도 홍대 출신도 아닌, 중졸의 43세 한국화가 박대성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