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 없는 중졸의 40대 화가…이건희는 ‘호암 650평’ 맡겼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2.01

이건희 컬렉션의 대표작은 국보 ‘인왕제색도’죠. 국보급 서화는 훼손을 막기 위해 전시기간에 제한을 두고 다른 작품과 바꿔 겁니다. 202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마련한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 ‘인왕제색도’와 번갈아 전시된 그림이 박대성(79)의 ‘불국설경(佛國雪景)’입니다. 23만 명 가까운 관객이 몰린 전시였죠.

이건희ㆍ홍라희 마스터피스

박대성(79)은 이건희(1942~2020) 회장과의 기억을 가진 몇 안 되는 생존 화가입니다. 1988년 이 회장과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요. 권근영 기자가 박대성의 경주 화실로 찾아갔습니다. 권 기자는 이불ㆍ서도호ㆍ양혜규ㆍ정연두 등 한국 미술을 이끄는 작가들과의 인터뷰집 『나는 예술가다』, 여성 미술가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 『완전한 이름』을 썼습니다.

6개월 넘게 끙끙 매고 그린 ‘불국설경’ 앞에 박대성(79) 화백이 앉았다. 경주에 7년 만에 눈 내린 1996년의 겨울날 새벽, 불국사의 적요를 눈감고 떠올렸다. 먹으로만 그린 흑백의 화면 좌우에 ‘천지인화(天地人和)’ ‘석양홍(夕陽紅)’ 낙관만 붉게 선명하다. 경주=권혁재 사진전문기자

6개월 넘게 끙끙 매고 그린 ‘불국설경’ 앞에 박대성(79) 화백이 앉았다. 경주에 7년 만에 눈 내린 1996년의 겨울날 새벽, 불국사의 적요를 눈감고 떠올렸다. 먹으로만 그린 흑백의 화면 좌우에 ‘천지인화(天地人和)’ ‘석양홍(夕陽紅)’ 낙관만 붉게 선명하다. 경주=권혁재 사진전문기자

②“집무실에 걸 그림 그려 달라”…‘이건희 전속 화가’ 박대성의 ‘불국설경’


“존경합니다.”
1988년 4월,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28층 집무실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은 세 살 아래의 한국화가 박대성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화가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왜요?”
“뭐든 상위 1~2%까지 오르는 사람이라면 제겐 존경의 대상입니다. 강도일지라도요. ”

1999년 5월 일랑 이종상 개인전에서 다시 만난 화가 박대성(왼쪽)과 이건희 삼성 회장. 가운데는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 사진 가나아트센터

1999년 5월 일랑 이종상 개인전에서 다시 만난 화가 박대성(왼쪽)과 이건희 삼성 회장. 가운데는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 사진 가나아트센터

“삼년상이 지나면 집무실을 바꿀 겁니다. 그때 그림을 그려 주세요.”
이병철(1910~87) 삼성 창업회장이 세상을 뜬 지 반년 뒤였다. 달항아리가 놓인 집무실에서 이건희는 새 그림을 주문했다. 후에 박대성은 금강산도를 그려 보냈다. 가늘고 긴 종이 위에 금강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그림이었다. 박대성은 그렇게 ‘이건희의 전속 화가’가 됐다. 정기적으로 그림을 그려 보냈고, 4년쯤 뒤 스스로 더는 못 그리겠다고 할 때까지 후원이 이어졌다.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박대성도 이건희에게 청을 하나 했다. “중국에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입니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 전이었다. 삼성물산 홍콩지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건희는 여비까지 챙겨줬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전북도립미술관에 기증된 '일출봉'(1988, 151x157㎝). 그의 또 다른 제주 성산 일출봉 연작은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판문점 정상 접견실에 걸렸다. 사진 전북도립미술관

이건희 컬렉션으로 전북도립미술관에 기증된 '일출봉'(1988, 151x157㎝). 그의 또 다른 제주 성산 일출봉 연작은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판문점 정상 접견실에 걸렸다. 사진 전북도립미술관

이건희와 처음 만난 때 박대성은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마친 참이었다. 1984년 서울 순화동 중앙일보 사옥에 개관한 호암갤러리는 ‘아르누보 유리명품전’으로 시작해 ‘조선백자전’까지 굵직한 전시를 이어갔지만 호응이 기대에 못 미쳤다.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던 중 서울대 출신도 홍대 출신도 아닌, 중졸의 43세 한국화가 박대성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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