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에 이부진까지 모았다, 부녀 홀린 청도 ‘검은 숯덩이’

  • 카드 발행 일시2024.03.07
지난해 여름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 앞에 설치한 이배의 '불로부터(Issu de feu)'. 커다란 숯묶음 세 덩이를 6.8m 높이로 쌓아 올렸다. 사진 조현화랑

지난해 여름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 앞에 설치한 이배의 '불로부터(Issu de feu)'. 커다란 숯묶음 세 덩이를 6.8m 높이로 쌓아 올렸다. 사진 조현화랑

이배(68), 요즘 미술계에서 부쩍 자주 들리는 이름입니다. 그는 지난해 여름 뉴욕 록펠러센터 앞에 높이 6.8m 거대한 숯덩어리를 세웠습니다. 캐나다에서 난 산불로 전시 개막일 뉴욕의 하늘까지 뿌옇게 됐다는데…. 재난과 치유를 상징하듯 검은 숯덩어리가 우뚝 섰습니다.

시작은 2000년, 44세 이배는 높이 85㎝ 숯덩어리를 고무줄로 묶은 ‘불로부터(Issu de feu)’ 시리즈를 처음 내놓았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전시 때였습니다. 전시장 바닥에 놓인 숯덩이 40여점 사이로 관객들이 거니는 장관이 연출됐죠. 좀처럼 그림이 팔리지 않던 이배의 터닝 포인트는 그때부터였습니다. 2021년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에 이때의 숯 조각이 두 점 포함돼 있습니다. 23년 뒤, 8배로 키운 숯덩어리로 맨해튼 한복판을 가로막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왜 지금 이배일까요? 그 답을 찾으러 작가의 고향인 경북 청도로 갔습니다.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 잔치에서, 그리고 다음 날 새벽 폐교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아파도, 싫어도, 매일 아침 작업실에 나가 그리는 이유, 들어보시죠.

1. 정월대보름 밤 타들어 간 달집…다음 날 새벽 폐교 작업실

서울 논현동 1964빌딩 로비에 설치된 '야곱의 사다리'(2023). 16m의 붓질 드로잉과 길이 4m 브론즈 조각으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다리에 대한 구약성서 야곱의 꿈 이야기를 표현했다. 사진 조현화랑

서울 논현동 1964빌딩 로비에 설치된 '야곱의 사다리'(2023). 16m의 붓질 드로잉과 길이 4m 브론즈 조각으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다리에 대한 구약성서 야곱의 꿈 이야기를 표현했다. 사진 조현화랑

#장면1 지난달 21일 서울 논현동 1964 빌딩, 나뭇결처럼 주름진 검은 브론즈 조각으로부터 16m 종이가 뻗어 올라갔다. 숯가루를 이겨 만든 안료를 먹처럼 찍어 그은 붓자국은 길이 됐다. 이배의 ‘야곱의 사다리’(2023)다. 곳곳에 이배의 작품이 놓인 이 건물 강당에서 이탈리아의 발렌티나 부치 큐레이터가 오는 4월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 전시를 설명했다. “달집태우기 영상의 여운을 가지고 주 전시장으로 가시면, 먹의 무거움과 붓질의 가벼움을 마주하며 사색에 빠질 겁니다.” 그는 ‘달집태우기’ 만큼은 한국말로 말했다. ‘이배-작가와의 대화’가 열린 이날 120석 강당이 꽉 찼다. 자리가 모자라 사람들은 뒤에 빼곡히 섰다.

 정월대보름인 지난달 24일 경북 청도군 화양읍 천변에서 달집태우기 행사가 열리고 있다. 가설 다리를 건너온 청중들이 타들어 가는 솔가지를 지켜보고 있다. 청도=권근영 기자

정월대보름인 지난달 24일 경북 청도군 화양읍 천변에서 달집태우기 행사가 열리고 있다. 가설 다리를 건너온 청중들이 타들어 가는 솔가지를 지켜보고 있다. 청도=권근영 기자

#장면2 정월대보름인 지난달 24일 경북 청도군 화양읍. 솔가지를 엮어 만든 달집이 천변에 섰다. 지역 주민들, 그리고 부산ㆍ대구에서 온 컬렉터 100여 명이 저마다 소원을 적어 달집에 묶었다. 농악대가 북을 쳤고, 부녀회는 가마솥을 걸어 따끈한 국물을 대접했다. 해질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이배가 달집에 불을 붙였다. 타다닥 소리내며 솔가지가 타들어갔고, 소원지도 함께 연기가 되어 날아갔다. 참석자들은 문득, 달집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청도 달집태우기는 비디오 설치 '버닝(Burning)'으로 제작돼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된다. 사진 조현화랑

청도 달집태우기는 비디오 설치 '버닝(Burning)'으로 제작돼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된다. 사진 조현화랑

글 싣는 순서

1. 정월 대보름 밤 타들어 간 달집…다음 날 새벽 폐교 작업실 (읽는 시간 144초)
2. 스승 박서보는 말했지 “내가 무명일 때 유명해졌다” (여기까지 218초)
3. 맨해튼 가로막은 숯덩어리…시작은 이건희 컬렉션의 그 작품 (316초)
📌 800자 더: 4년 만에 2.5배, 힘센 숯 작업…이배의 그림값 (364초)
📌 300자 더: 이우환의 조수 시절, 스테이플러로 찍은 그림 (38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