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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4만 초호황, 그 뒤엔 기업체질 바꾼 'PBR 1배'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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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끝나고 있습니다. 주식시장 활황은 일본 경제의 변화를 알리는 분명한 신호입니다.”

이와나가 모리유키(岩永守幸) 도쿄증권거래소(도쿄거래소) 대표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인터뷰를 위해 도쿄(東京) 니혼바시(日本橋)에 있는 일본증권거래소(JPX) 본사를 찾아간 지난달 27일, 일본증시 대표지수인 닛케이지수는 다시 4만을 넘어 장 중 한때 4만1010까지 치솟았다. 2층 증시 안내판엔 상장 기업의 주가 상승을 알리는 빨간 숫자가 가득했다. 이와나가 대표는 “일본 기업들의 좋은 실적이 주가 상승을 끌어가는 힘”이라면서 “외국인뿐 아니라 일본 내 개인들의 투자도 급격히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7일 일본 도쿄 JPX 본사에서 이와나가 모리유키 도쿄증권거래소 대표가 일본 주식시장의 성장과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영희 특파원

지난달 27일 일본 도쿄 JPX 본사에서 이와나가 모리유키 도쿄증권거래소 대표가 일본 주식시장의 성장과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영희 특파원

미국 금융위기 이후인 2009년 3월 최저가인 7054까지 하락했던 닛케이지수는 지난 2월 22일 거품 경제 시기였던 1989년 12월의 최고치 3만8957을 약 34년 만에 갱신했다. 지난달 4일엔 ‘꿈의 숫자’로 불리던 4만을 넘어선 뒤에도 탄탄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의 주가 상승을 견인한 것은 엔저 현상에 힘입은 일본 기업의 실적 향상 외에도 일본 정부가 추진한 개인 투자 촉진 정책, JPX가 주도한 기업 거버넌스 개혁 프로그램이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현지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와나가 대표는 1984년 도쿄거래소에 입사해 경영기획·정보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를 거쳤고 지난해 4월부터 도쿄거래소 최고경영자(CEO) 및 도쿄·오사카 거래소를 거느린 JPX의 COO(최고운영책임자)를 맡고 있다. JPX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자본 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구현을 위한 행동’(‘저PBR(주가순자산비율) 개혁’)을 이끌고 있다.

일본 주식시장 호황의 원인은 무엇인가. 
일본 기업들의 올해 1분기 이익은 작년 같은 시기보다 약 13% 증가했다. 내년도 올해에 비해 약 8%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주가는 미래의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 성장 전망이 좋으니 주식을 사려는 사람이 늘어난다. 물가도 오르고, 임금 상승도 가파르다. ‘디플레이션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다.
일부 종목만 급상승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반도체주와 유니클로 같은 대형주가 유독 잘 나가는 것은 맞다. 하지만 1989년 버블기 때 일본 주식시장 상장 회사가 1700개사, 시가총액이 590조엔(약 5252조원) 정도였다면 지금은 3900개 회사에 980조엔(약 8725조원)이다. 일본 주식시장 규모는 꾸준히 커졌고 질적으로 달라졌다. 지난 1년 간 외국인이 일본 주식을 7조엔(약 62조원) 가량 순매수하는 등 외국 자본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있다.
일본 도쿄 JPX 건물에 있는 종. 새로 상장되는 기업이 있으면 이 종을 울려 축하한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도쿄 JPX 건물에 있는 종. 새로 상장되는 기업이 있으면 이 종을 울려 축하한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기업의 질적 변화 중 하나가 거버넌스 개혁이다. JPX는 지난해 3월 상장 기업을 대상으로 ‘저PBR(주가순자산비율) 개혁’ 이니셔티브를 발표하면서 ‘PBR 1배’를 기준으로 삼았다. PBR은 주가를 주당 순자산가치로 나눈 값으로, PBR이 1배 미만이라는 것은 회사 자산에 비해 주식 시장 평가 가치가 낮다는 의미다. JPX는 PBR이 1배 미만인 기업은 물론 1배 이상인 기업들에게도 앞으로 어떻게 자본 효율성을 개선하고 주가를 올릴 것인 지에 대한 계획안을 홈페이지에 공지하도록 요구했다. 최근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이를 벤치마킹했다.

결과는 주목할 만 하다. 지난달 말까지 일본 프라임 시장(한국 코스피에 해당) 상장사 70%가 계획안을 홈페이지에 공시했다. 지난달 26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일본 상장 기업이 주주에게 지급한 배당금은 작년에 비해 6% 증가했고, 자사주 매입은 9% 늘었다.

도입 1년 만에 좋은 성과를 거둔 듯하다. 
최근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JPX가 기업에 거버넌스 개혁을 요구한 건 1990년대부터다. 당시엔 상장사에서 발생하는 사업주의 공금 횡령 등 불미스러운 사건을 체크하겠다는 의미였다. 2000년대 들어 회사의 성장을 촉진하고 기업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2009년 독립임원(사외이사) 선임에 대한 권고를 내렸고 2015년 기업지배구조행동(이른바 ‘거버넌스 코드’)을 제정했다. 프라임 시장 상장사의 경우 이사회의 3분의 1 이상을 사외이사로 채우도록 했는데 현재 대상 기업의 95%가 이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하나.
‘PBR 1배’라는 알기 쉬운 목표를 제시한 게 효과가 컸다. 처음 꺼냈을 때 상장기업 대표들 중 ‘PBR이 뭐냐’고 반문한 사람도 있었을 만큼 일본 기업의 주식 시장 이해도가 낮았다. 하지만 언론에서 ‘PBR 1배가 안되는 회사는 실격’이라는 보도를 이어갔고, 경영자들도 명확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따르지 않는 기업에 페널티가 있나.
‘상장 폐지’ 등 페널티가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페널티를 부과하면 형식적으로만 기준을 맞추는 곳이 분명히 나온다. 그보다는 기업들이 주주의 중요성과 가치를 인식하고 상황에 맞는 전략을 만들도록 북돋우는 게 중요하다. 평가는 시장에서 주식을 사는 사람들이 하면 된다. 

이와나가 대표는 이런 일본 경제의 변화를 ‘뱅크(Bank) 거버넌스’에서 ‘에퀴티(equity·주식) 거버넌스’로의 전환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일본 경제가 개인이 저축한 돈을 은행이 기업에 융자해 성장하는 구조였다면, 이젠 투자를 받은 기업이 주주와의 관계에서 리스크를 감수하며 성장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도 취임 초부터 ‘새로운 자본주의’를 내세우며 투자를 통한 개인들의 자산 확대를 강조했다. 이를 위한 정책이 한국의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의 일본판인 NISA 제도의 확대다. 올해부터 NISA 통장을 통해 개인이 주식투자를 할 경우 비과세 규모를 매년 360만엔(약 3200만원)까지 늘리고 비과세 기간도 무기한으로 연장했다.

일본 주식시장 성장세는 지속될까.
그렇다. 작년까지의 주가는 외국인이 끌어올렸다면 이제는 일본인들이 일본 주식을 사는 시대가 왔다. NISA 통장 개설 수는 지난해 1~3월 평균과 비교해 올해 2월엔 2.9배나 늘었고 유입 금액은 3.3배 증가했다. 그동안 NISA로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올해 들어 유입 금액의 절반 정도가 일본 주식으로 들어온다. 오랜 기간 주식을 보유했던 사람의 매도도 이어지지만, 그들도 그 돈으로 다시 일본 주식을 사고 있다. 일본 주가가 오르면 개인의 삶도 윤택해지는 선순환이 이제 시작되고 있다. 
일본은행(BOJ)이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했고 금리 상승도 예상되는데.
마이너스 금리는 없어졌지만 금융 완화 기조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까지 주식시장엔 큰 영향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이제 막 시작한 한국에 조언한다면?
서구 투자자들이 최근 10년 간 중국에 약 35조엔(약 311조원)을 투자했는데 최근 리스크가 크다는 판단으로 상당수가 대체 투자처를 찾고 있다. 이 돈이 일본 시장, 한국 시장으로 흘러 들어와 동아시아가 함께 성장해야 한다. 기업 체질을 바꾸는 것은 단기간에 되지 않는다. 변화하는 국제 금융 시장의 흐름에 기업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인내심을 갖고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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