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계 「P·H사단」이 요직에 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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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북한의 정계 인맥에서도 지방색이 매우 강하다. 북한은 6·25후 노동당시책으로 강력히 추진한 지방주의 배격정책으로 언어·민속·음식·교육면에서는 지방색이 소실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치분야는 특정지역인물 등용을 선호, 인맥에서만은 수도평양과 북쪽산간지방인 함북출신이 대부분 요직을 차지하고있다.
이 같은 북한인맥의 지방색을 놓고 국내 일부 북한문제전문가들은 북한의 정계에서도 「P· H (평양과 함북의 영어이니셜) 사단」이 엄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남한에서는 지방색이 정도를 넘어 망국법인 「지역감정」으로까지 치달아 이를 해소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있다. 북한도 40여 년 동안 계속된 지방색이 내부적으로는 인민들의 불평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워낙 경직된 사회여서 남한처럼 노골적인 사회문제로 표출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의 지방색 배격운동과 지방색의 실상·배경 등을 알아본다. 【편집자주】

<지방색타파>
북한의 지방색 타파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50년대의 「반종파 투쟁」이후부터다.
52년12월 노동당중앙위원회가 5차 전원회의에서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계를 제거하면서 시작되어 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최창익 등 소련파와 연안파를 출당시킴으로써 50년대의 반종파 투쟁이 막을 내렸다.
이후부터 북한에서는 종파주의와 지방주의를 철저히 배격해 오고 있다.
이에 앞서 북한은 해방이후부터 「지방색이 인민들의 단합을 해친다」는 이유로 대동단결을 위해 인민 대이동을 실시했다.
개성시의 경우 6·25이전 남한의 통치지역이었다는 이유로 개성시민을 사상면에서 회색분자로 간주, 시민의 90%를 양강도· 자강도 등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같은 정책으로 현재 개성 시에는 개성토박이가 10%정도(대부분 노인)뿐이다.
특히 「전연」(휴전선)지역의 거주자는 모두 타 지역 출신들로 교체, 평북출신이 대부분이다.
북한의 지방색 배격정책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 언어정책.
66년5월14일 김일성은 「조선어의 민족적 특성을 옳게 살려나갈데 대하여」라는 담화문을 발표, ▲평양 말을 중심으로 고유어를 발전시킬 것 ▲공산주의 건설에 힘있는 무기가 되도록 말을 다듬을 것 ▲새로운 말의 체계는 평양을 기준으로 한 「문화어」를 제정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내각 직속으로 국어사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사회과학원에는 국어사정지도처 및 언어학연구소등을 설치하여 「문화어」를 체계화하는 대대적인 작업을 벌었다.
북한은 언어정책의 기본방침으로 ▲언어는 사회주의 건설의 무기이며 사회주의 문화를 남한에 침투시키는 무기다. ▲통일과 단결을 염두에 두고 민족적 특성을 살린 「민족어」를 발전시켜야만 한다. ▲서울말은 부르좌 계층의 언어이므로 평양 말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어」를 발전시켜야 한다.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발전시키고 혁명적 용어로 만들어 사회주의 사상성을 고취시켜야 한다는 것 등을 내세웠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북한은 일상생활 용어는 말할 것도 없이 사상·공작·정치·군사·경제·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용어를 만들어 통일시켰다.
따라서 해방전 각 지방의 특색 있는 생활용어(사투리)·어휘 등이 대부분 사라졌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에 따르면 남한의 TV·인쇄물 등에 나오는 「했었지비」「에미나이」등의 억센 사투리가 대부분 사라지고 지방산골 어디에 가도 「평양문화어」(표준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협동별」(협동농장) 「다락 밭」(산지에 계단식으로 된 밭) 「당의 아들」(부모를 고발한 나이 어린 철부지를 치켜세우는 호칭) 등 신조어가 많이 생겨났고 평양의 거리 명을 「주체사상거리」 「개선문거리」 「창광 거리」등으로 창조하기도 했다.
북한의 이 같은 지방색 타파정책으로 지역의 고유민속음식 지키기도 시들해졌다. 현재 북한에서 명맥을 유지하고있는 지방별 고유민속음식은 평양냉면·숭어냄비 탕, 함흥 가자미 식혜, 개성 보쌈김치· 추어탕. 약밥, 청률 우동, 금강산 조개구이·돌 불고기 등뿐이다.
북한의 지방색 배격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육의 지방별격차 없애기 운동이다.
김일성 종합대·김책공대·평양외국어대·평양의대 등 명문대 입학정원에 지방별로 일정수(평균5%)를 안배하고있다.
또 지역별로 사범대학·공과대학 등 단과대학을 고루 배치하고 84년부터 신설된 북한의 영재교육기관인 「제일고등중학교」도 도청소재지에 1개교씩 두었다.


북한의 지방주의 배격정책은 당정관료 등 인물등용 면에서도 예외 일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인민에 대한선전수단인 외형상의 지방색 타파일 뿐 실제로는 평양과 함북출신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지고 있다.
노동당중앙간부는 고위급의 경우 이른바 혁명1세대 출신기반인 함북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김정일 등장이후 신진간부의 경우는 평양출신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와 반대로 개성출신의 노동당간부는 한 명도 없으며 황해 남·북도, 강원도 등 남한과 인접한 지역의 출신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현재 북한을 움직이는 1백인 중 평양·함북출신이 40명(함북28, 평양12)이며 여기에 함남출신 11명을 포함하면 전체의 51%가 평양과 함경도 출신인 셈이다.
특히 16일 현재 북한의 권력서열 23위 중 함북출신이 12명(52%)으로 주요 요직을 독점, 그 위세가 대단하다.
권력서열 4위와 5위인 국가부주석 이종옥 박성철, 남북고위급 회담 대표인 연형묵 정무원총리(6위), 정무원부총리 겸 외교부장 김영남(7위) 국방위원회부위원장 겸 인민군 총참모장 최광 (8위), 김정일의 측근 인물 중 유일한 중공업 분야 전문가로 80년 대들어 가장 순조로운 권력 상승기류를 타고 있는 당 경제담당 비서 한성룡(10위), 최고인민회의 외교부장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11위), 당 경제담당 비서 겸 국방위원회위원 전병호 (12위), 전 정무원 총리를 지낸 함북도 당 책임비서 강성산(13위) 당비서 겸 정무원 교육위원회위원장 최태복(16위), 정무원 부총리 강희원(21위), 정무원부총리 홍시학 (23위) 등이 모두 함북 출신이다.
특히 당의 노선과 정책을 수립하고 중요한 전략·전술 문제를 심의, 최종 결재함으로써 사실상 북한정권의 최고정상기구인 노동당 정치국 위원 14명중 함북출신이 9명(64%)으로 당연직인 김일성 부자를 제외하면 사실상 75%를 차지한다.
정치국 후보위원(10명)도 함북출신이 3명이며 비서국비서(11명) 는 6명 (55%)이나 된다.
이밖에 당 중앙군사위원회(위원장 김일성) 위원(15명) 중 전문섭(대장·인민무력부 부부장) · 백학림(대장·사회안전부장)·이을설(대장·평양방위사령관) 등 3명과 당 부장 김국태·황남도 당 책임비서 백범수 등이 모두 함북출신이다.
평양출신으로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당과 군사의 핵심간부를 맡고 있는 당비서 서관희(전 정무원부총리·주체농업창안자), 당 군사부장 김강환(중장), 해군사령관 김일철(상장·해군현대화의 주역), 당 행정 및 혁명소조사업부장 김시학 등이 있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같이 북한의 지도자들 가운데 함북출신이 많은 것은 김일성 주석의 빨치산 근거지가 백두산에서 연변지역에 이르는 동만 주였으므로 빨치산들이 국내 쪽의 침투, 갑산 공작대의 활동지가 주로 함북일대였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빨치산 활동근거지와 국내 인접지역이 함북이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내왕이 갖아 해방 후 김일성을 비롯, 빨치산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자연스럽게 빨치산 가운데 함북인사가 많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김일성은 집권 후 줄곧 「함북출신이 사상성이 온건하다」는 이유로 교분이 있는 함북출신을 등용했고 함북 빨치산 2세들까지 등장, 당정의 고위층을 차지하게된 것이다.
또 평양출신의 등용이 두드러진 이유는 평양이 북한정권의 수도이며 교육·문화 등 여건이 좋아 우수한 인재들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특히 김정일이 김일성 종합대 등 명문대졸업자중 평양출신 인재들을「3대 혁명소조 원」등 당과 군·정무원의 신진간부로 대거 등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북한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김국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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