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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민근의 시선

이창용 한은 총재가 못 다한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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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중앙은행은 크게 두 가지 무기로 통화정책을 편다. 기준금리, 그리고 ‘입’이다. 금리 조정은 파괴력이 크고 효과도 즉각적이다. 하지만 매번 쓰긴 어렵다. 경제 전반에 파장을 미치는 일종의 ‘무차별 폭격’이어서다. 그 보완 수단이 입이다. 시장의 기대를 미세 조정해야 할 때 수장이 발언에 나선다. 일종의 ‘정밀 유도미사일’이다.

하지만 말로 시장을 요리하는 게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다. 조그마한 표현 변화에도 예민한 시장은 히스테리를 일으키기 일쑤다. 한국은행 총재도 이를 잘 안다. 그러니 웬만하면 단정적 표현이나, 감정이 실린 언급은 자제한다. 발언 주제 역시 소관 업무인 금리나 물가, 환율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다. 정부나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성을 중시하는 만큼 다른 영역을 침범하는 걸 삼간다. 일종의 ‘명예로운 고립’이다.

연금·노동·교육개혁 촉구한 파격
재정·저금리 중독현상에도 일침
말 아끼며 암시한 ‘기득권 깨기’
이젠 정부·정치권이 행동할 때

그런 면에서 지난달 25일 이창용 총재의 기자간담회 발언은 파격적이었다. 표현은 직설적이었고, 주제도 경계를 넘었다. ‘저성장이 장기화할 우려’에 대한 질문에 이창용 총재는 “이미 장기 저성장 구조에 와 있다”고 단언했다. 우려 수준이 아니라 이미 닥친 현실이란 얘기다. 그리고 작심한 듯 5분여간 ‘대한민국 구조개혁론’을 폈다.

그는 장기 저성장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은 연금·노동·교육을 포함한 구조개혁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문제는 개혁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이해당사자 간 사회적 타협이 어려워 진척이 안 된다는 것이고,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 중심으로 논의하는 바람에 한 발짝도 못 나간다는 것”이라며 답답해했다. 이어 “이런 것을 해결하지 못하니 결국 재정 풀어서 해결하라, 금리 낮춰서 해결하라 한다. 그건 나라 망가지는 지름길”이라고 개탄했다.

이 총재는 다변가다. 하지만 이날 발언이 즉흥적으로 나온 건 아니라는 게 한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내부적으로 메시지를 공유하고 표현도 가다듬었다고 한다. 의도한 바가 있었다는 의미다.

이 총재의 ‘경계를 넘는’ 발언이 겨냥한 건  무엇이었을까. 역설적이지만 한은의 통화정책이 가진 한계를 명확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은은 올 성장률 전망치를 1.4%로 내렸다. 보통 한은이 성장 전망치를 내리면 시장에선 통화정책이 완화될 것이란 기대가 싹튼다.

게다가 내년 4월에는 국회의원 총선거도 있다. 재정을 풀고, 금리를 낮춰 경기를 띄우고 싶은 유혹과 압박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지는 시기다. 이 총재의 거듭된 시기상조론에도 ‘연내 인하’ 관측이 수그러들지 않았던 배경이다. 이에 그는 ‘구조적 저성장’을 기정사실로 하면서, 금리로는 풀 수 없는 문제라고 못을 박았다. 돈 풀기에 중독된 시장에 일침을 가하는 한편 스스로 배수진을 친 셈이다.

이렇듯 작심하고 내놓은 발언이지만, 수위를 낮춘 대목도 있다고 한다. 구조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기득권 체제’에 대한 직접적 언급과 비판이다. 자칫 정치적인 논란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공급자 중심의 개혁 논의’ ‘사회적 타협의 어려움’ 등으로 완곡히 표현된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으론 굳이 이것까지 지적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교육·노동·연금은 말할 것도 없고 의료·법률·부동산 등 서비스 산업 곳곳에서 목소리 큰 이해집단이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온 국민이 안다. 여기에 표만 쫓는 정치권, 무책임한 관료가 가세하면 공고한 기득권의 성채가 구축된다. 바늘 하나 꽂을 데 없이 촘촘히 짜인 이 체제에서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혁신은 싹이 트기도 전에 질식하고 만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정부 때 벌어진 ‘타다 잔혹극’이다. 이해단체의 공세, 여야의 담합, 정부의 방관 속에 타다는 사실상 공중분해 됐다. 불법 콜택시 영업 혐의로 기소됐던 타다 경영진이 최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장르가 ‘부조리극’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3년이 지난 지금 남은 것은 여전히 낙후한 운수업,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난 택시기사들의 빈자리뿐이다. 스타트업 업계에선 “이런 식이라면 ‘AI 금지법’이라고 못 만들겠느냐”는 한탄도 나온다.

이관섭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은 2일 여당 당협위원장 워크숍에서 3대 개혁과 관련해 “미래를 위해, 표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도전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며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비상한 각오만큼 추진 속도에도 탄력이 붙길 기대한다. 한은 총재가 더는 ‘경계 넘기’를 고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