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사러가자"…女대사 모인 '서울시스터즈', 유독 끈끈한 이유 [시크릿 대사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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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주한 외교가의 자칭 '서울 시스터즈'가 경복궁에 모였다. 왼쪽부터 마리아 테레사 디존-데베가 주한 필리핀 대사, 마르시아 도네르 아르베루 주한 브라질 대사, 타마라 모휘니 주한 캐나다 대사. 우상조 기자

주한 외교가의 자칭 '서울 시스터즈'가 경복궁에 모였다. 왼쪽부터 마리아 테레사 디존-데베가 주한 필리핀 대사, 마르시아 도네르 아르베루 주한 브라질 대사, 타마라 모휘니 주한 캐나다 대사. 우상조 기자

"국경일 행사에 입을 한복을 사고 싶은데 어디가 좋을까?"
"아무래도 인사동 아닐까?"
"남대문도 괜찮던데. 휴일에 같이 가볼까?"

주한 여성대사들이 모여 만든 단톡방에 오가는 대화들의 일부 요지. 해외 카카오톡 격인 왓츠앱에 개설된 이 단톡방에선 박진 외교부 장관의 주한 여성 대사 오찬 초청 공지부터, 쇼핑 꿀팁 및 외교 정책까지 다양한 정보가 오간다. 주한 여성대사들은 자칭 '서울 시스터즈(the Seoul Sisters)'. 이 단톡방은 서울 시스터즈의 네트워킹 채널인 셈. 서울 시스터즈들의 숫자는 올봄, 역대 최다 25인을 기록했다. 서울 시스터즈 좌장 격인 타마라 모휘니 주한 캐나다 대사, 마르시아 도네르 아브레우 주한 브라질 대사, 마리아 테레사 디존-데베가 주한 필리핀 대사를 '시크릿 대사관 시즌2'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초대했다. 봄날의 경복궁에 모인 이들은 "한국 사극 드라마의 한 장면을 찍는 것 같아 즐겁다"고 입을 모았다.

모휘니 대사는 "한국에 주재하는 여성 외교관들이 늘어나고, 서로를 도와 활동하고 있는 건 여러모로 반가운 신호"라며 "여성에겐 서로 협력하는 DNA가 있다"고 말했다. 아브라우 대사도 "스위스에서 근무할 때도 여성 외교관들의 다국적 모임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디존-데베가 대사는 "서울 시스터즈들은 유난히 더 잘 뭉치는 것 같다"고 맞장구쳤다. 이들은 함께 외교 정책 및 토론회 등 각종 행사도 개최하며 국경을 넘어 든든한 동지가 되어 준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지난 3월 10일 주한 여성대사들만을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열었을 정도로 서울 시스터즈의 존재감은 크다.

서울 시스터즈들은 그러나 남성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남성 동료들과도 협력하는 게 진정한 협력"(모휘니 대사)라고 강조하면서다. 단 여성 외교관에 대한 유리천장이 아직 견고하다는 점은 여성뿐 아닌 인류 모두의 행복을 위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은 굳건하다. 관련 대화를 옮긴다.

모휘니 대사="여성의 권리를 위한 젠더 평등은 남성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다. 우리 서울 시스터즈만 하더라도 남녀 불문, 흥미로운 이들을 초청해 강연을 듣고 토론을 한다."
아브레우 대사="젠더를 떠나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인류 모두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필수 요소다. 여성 외교관으로 힘든 점도 물론 있지만, 사실 여성이라 더 좋은 점도 있다. 감성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외교를 할 수 있다는 점처럼."
디존-데베가 대사="팬데믹 시기에 바로 여성 외교관들의 그런 장점이 잘 발휘된 것 같다. 모두 힘든 시기에 여성의 공감 외교가 힘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타마라 모휘니 주한 캐나다 대사. 우상조 기자

마리아 테레사 디존-데베가 주한 필리핀 대사. 우상조 기자
마르시아 도네르 아브레우 주한 브라질 대사. 우상조 기자

물론, 여성이라는 점이 항상 좋지만은 않다고. 이들은 "때로 대사관저 저녁식사 메뉴 또는 정원 가꾸는 일에 대해 내게 물어오는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저기, 저는 대사의 배우자가 아니라 대사입니다'라고 답해줘야 한다"거나 "남편도 현재 타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는데, 가끔 '테이블 세팅 이렇게 하면 될까'라고 물어와서 '그런 건 의전 담당 직원에게 물어보라'고 답해줘야 한다"고 털어놨다. 모휘니 대사는 "내가 서울에 있든 캐나다에 있든 항상 '그거 어디에 뒀지?'라는 질문을 받는다"며 웃었다.

이들은 한국 부임 자체는 1년 정도로 길지 않지만,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아오며 외교의 지평이 변화하는 것을 몸소 겪었다. 모휘니 대사는 "대사의 배우자들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많은 여성 외교관들은 혼자 일을 해야 하니 더 힘든 경우가 많았다"며 "아이가 아프거나 하면 특히 문제인데, 이젠 그래도 나름의 멀티태스킹 지혜도 생겼고, 사회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타마라 모휘니 주한 캐나다 대사는 최근 윤석열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 개량 한복을 입었다. 맨 오른쪽은 장호진 외교부 제1차관. [대통령실사진기자단=세계일보 이재문 기자]

타마라 모휘니 주한 캐나다 대사는 최근 윤석열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 개량 한복을 입었다. 맨 오른쪽은 장호진 외교부 제1차관. [대통령실사진기자단=세계일보 이재문 기자]

디존-데베가 대사는 "여전히 통상이나 핵 협상처럼 전문성이 더 요구되는 분야는 실무까진 여성이 하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많고, 외교부 장관도 대다수가 남자"라고 말했다. 아브레우 대사 역시 "점수로만 뽑으면 죄다 여성일텐데, 여성 외교관들에겐 여전히 승진 장벽이 있다"면서도 "그래도 외교관이 처음 됐을 때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모휘니 대사 역시 "그래도 외교가 바뀌어가고 있다"며 "중요한 건 젊은 여성들이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3월 주한 여성 대사들과의 오찬 간담회 소식을 전한 외교부 트위터. 주한 여성 대사들 숫자는 2023년 현재 역대 최다급이다. [트위터 캡처]

지난 3월 주한 여성 대사들과의 오찬 간담회 소식을 전한 외교부 트위터. 주한 여성 대사들 숫자는 2023년 현재 역대 최다급이다. [트위터 캡처]

한국은 이들에게 여러모로 흥미로운 부임지다. 디존-데베가 대사는 "K팝 수능이 있다면 내가 단연 1등"이라고 말했고, 아브레우 대사는 "브라질 국기 색상으로 한복을 맞춰 행사에 입고 나갔는데, 한국뿐 아니라 브라질에서도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모휘니 대사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여성 대사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지만, 서울 시스터즈는 유독 끈끈하다"며 "아마도 한국이라는 국가가 주는 특유의 에너지 덕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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