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우계의『꽃을 보면』|"꽃으로 비유된 우리시대의 타락한 삶"|오세영<시인·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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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요즘 들어 우리 시들, 특히 신인들의 시는 매우 사변적인 것 같다.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도 복잡하게 이야기하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도 부러 하는 듯한 인상이다. 세상이 복잡해서 할 이야기가 많은 탓일까, 아니면 시가 지닌 근엄성을 깨부수려는 그 나름의 실험의식 때문일까. 잘은 모르지만 요즘우리 시단에 흐르고 있는 저류의 하나가 일종의 반시 의식과 사회적 효용론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이는 민중시라고 불리는 유파나 모더니즘의 시, 소위 해체 시라고 불리는 유파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민중시는 기존 제도권의 가치체계를 일단 부정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모더니즘의 시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전자는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후자는 문명사적 측면에서 촉발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에서 연유된 시의 사회적 효용론과 반시 의식이 요즘 우리 시단에서 시의 정통적 문법을 거부하거나 이를 깨뜨리는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한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서 확산되고 있는 우리 시의 사변적 경향과 산문 화는 비록 반시 의식과 시의 사회적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나름의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겉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시의 무정부주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진단이다. 그 무정부적 상태가 논자에 따라 어떻게 옹호되든 간에 그것이 시의 전통적 미학을 떠받들고 있는 원칙, 혹은 규범의 파괴를 뜻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홍유계의「꽃을 보면」(『현대 시』11월 호)은 오늘의 우리 시단에 하나의 반성적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가까이 서 홀로 꽃을 보면/꽃은 홀랑 여우가 되고/ 여우는 재주넘어 처녀가 되고/ 처녀는 나를 홀려 혼 빼먹고/ 내 죽으면/ 처녀는 다시 꽃 되고/천년 넘게 젊어진 꽃은/할 끔/피묻은 입술.』 우선 이시는 미학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아름답다. 그리고 감동적이다.
요즘 우리 신인들의 시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광기나 독설·야유·신경증 적 독백·분열된 의식의 편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것은 통합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건강하며, 모든 것은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물론 여기에 치열한 실험의식은 없다. 그러나 항상 실험이 우선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생체 실험도 의의가 그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의 임상이다. 과학자는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모르모트를 생체 실험하는 것이다. <꽃을 보면>은 비유적으로 우리시단에서 모두가 생체 실험에 몰두해 환자의 치유를 등한시 할 때 임상이 절박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홍우계는 시가 가능한 말을 하지 않으려는데 그 본질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시는 가능한 한 언어를 절제한다. 그리하여 셸리는 그의<사랑의 철학>에서 톨스토이가 한 권의 책『부활』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박애주의」를 단 열댓 줄로 말하지 않았던가. 각기 짧은 9행의 시행으로 한편의 작품을 완성시킨<꽃을 보면>의 시적 언어의식은 바로 이와 같은 설 천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시는 상상력의 전개에 있어서 놀랄 만한 신선 감을 제공해 주고 있다.「꽃」을「여우」로,「처녀」로,「피 묻은 입술」로 변주시킨 그의 연상작용은 탁월하다. 그러나 이 시의 대표적 상징으로 제시된「꽃」은 단순히 미학적 차원의 자연 만은 아니다. 이 시가 보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꽃」이 한 시대-자본주의 사회의 퇴폐적(유미적-키에르케고르)삶을 은유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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