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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용기 내자 1400명 "나도 당했다"...日자위대 뒤집은 '미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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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 피해가 심했던 미야기(宮城)현에 살던 고노이 리나(五ノ井里奈)는 당시 불과 11살의 여자아이였다. 어린 고노이의 눈에 지진 현장에서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돕던 자위대 대원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도 군인이 돼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고 결심한 지 9년. 마침내 자위대에 들어간 그의 꿈은 이뤄진 듯 보였다. 그러나 입대 직후 갓 스물이던 그가 직면한 건 남성 대원들의 성적 학대였다.

 전 일본자위대 육상자위관 출신인 고노이 리나(23)는 일본 자위대 내에서 자신이 겪은 성적학대 사실을 고발한 인물이다. EPA=연합뉴스

전 일본자위대 육상자위관 출신인 고노이 리나(23)는 일본 자위대 내에서 자신이 겪은 성적학대 사실을 고발한 인물이다. EPA=연합뉴스

최근 미국 워싱턴포스트(WP)와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은 조직 내에서 당한 성적 학대 피해를 공개적으로 고백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전 일본자위대 육상자위관 고노이 리나(23)의 사연을 보도했다.

2020년부터 고노이는 부대 내에서 원치 않는 신체 접촉 등에 시달렸다. 내부 행사에서 가해자들은 그의 가슴을 만지고 강제로 입을 맞췄다. 남성 대원 성기를 만지라는 강요도 있었다. 2021년 '훈련'이라며 10명 이상의 남성 동료에 둘러싸인 그는 억지로 땅바닥에 눕혀졌고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행동을 취해야 했다. 가해자 상당수는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한다.

전 일본 자위대 대원 고노이 리나(사진). AFP=연합뉴스

전 일본 자위대 대원 고노이 리나(사진). AFP=연합뉴스

중·고등학교 때 유도를 했던 그이지만 남성 여러 명을 제압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말리는 사람이 있기는커녕 다들 오히려 그 상황을 웃고 즐겼다는 데 그는 절망했다.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 그는 성학대 피해가 아닌 "암투병중인 어머니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대 휴가를 얻기도 했다.

고노이 리나 전 일본 자위대 대원이 2022년 12월 19일 도쿄 일본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을 듣고 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런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지켜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AP=연합뉴스

고노이 리나 전 일본 자위대 대원이 2022년 12월 19일 도쿄 일본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을 듣고 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런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지켜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AP=연합뉴스

한계에 달한 그는 같은 여성인 상관에 이 문제를 보고했다. 사건에 연루된 남성 상관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당사자는 혐의를 부인했다. 자위대 측에서는 가해자 일부를 검찰에 송치했지만, 전원 불기소됐다. "증인을 찾지 못했다"는 게 검찰 측 설명이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한때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고노이는 WP에 "절망하던 그때, 대지진 당시 사망한 반 친구들을 떠올렸다"면서 "지진에서 살아남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다는 게 끔찍했고 계속 싸워야겠다고 느꼈다"고 털어놨다.

고노이는 자기 얼굴을 내놓고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누군가 들어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방송사에 취재 요청을 했지만 번번이 무시당하자 그는 유튜브를 통해 자신이 겪은 일을 폭로했다. 13만 명의 서명도 받아 군에 재조사 요구서를 제출했다.

그는 지난해 기자회견에서 "성적 학대는 마치 커뮤니케이션의 일부처럼 행해져서 다들 감각이 마비돼 있었다"면서 "세상이 주목하지 않았다면 은폐된 채 남자대원들이 태연하게 다른 여자대원에게 똑같은 행위를 반복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간의 이목이 쏠리자 자위대는 특별 감찰에 착수했다. 감찰 결과 대원 상당수가 고노이를 성폭행하고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사실이 확인됐다. 자위대 내 10%에 불과한 여성 대원들은 고노이 덕에 용기를 냈다. WP는 "고노이의 사건 재조사가 이뤄지자 자위대에는 2개월 만에 1400건의 피해 신고가 신규 접수됐다"고 전했다. 이 가운데는 여성 대원의 속옷을 훔치거나 도촬(몰래 촬영)을 한 사례 등도 포함됐다.

고노이 리나는 2022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사진 고노이 리나 트위터 캡처

고노이 리나는 2022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사진 고노이 리나 트위터 캡처

뒤늦게 일본 방위성은 지난해 12월 직접 학대에 가담한 4명과 지시한 1명 등 5명을 불명예 제대시켰다. 요시다 요시히데(吉田圭秀) 육상 막료장은 기자회견에서 "괴롭힘을 용납하지 않는 조직문화를 확립하겠다"고 했지만, 본질적인 대책은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실제로 피해 사실을 묵살한 중대장은 6개월 정직이란 솜방망이 처분에 그쳤다.

WP는 "일본은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지만 양성평등 문제에선 후진적이다"면서 "전 세계 미투(#me too·성폭행·성희롱 사건에서 여론을 결집해 사회적으로 고발하는 것) 운동도 일본에서는 흐지부지됐으며 성적 학대를 침묵하는 문화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사건을 폭로한 뒤 일본 인터넷에서는 피해자인 고노이에 대한 협박·비난 등 2차 가해마저 벌어졌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일본 자위대 소속 대원들이 기자회견에서 고노이 리나(앞줄 왼쪽)에게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고노이는 자위대의 조치에 만족하지 않고 가해자와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AFP=연합뉴스

일본 자위대 소속 대원들이 기자회견에서 고노이 리나(앞줄 왼쪽)에게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고노이는 자위대의 조치에 만족하지 않고 가해자와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AFP=연합뉴스

고노이도 자위대의 조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 1월 성적 학대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며 가해자 5명에게 550만엔(약 5336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정부에도 200만엔(약 1940만원)의 국가 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그는 WP에 "자위대 내부의 체계적인 변화를 갈망한다"면서 "피해자는 내가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비록 자위대 생활은 접었지만, 그의 일상은 계속되고 있다. 아사히 신문은 그가 최근 요코하마(横浜)의 한 유도장에서 유도 지도자로 두 번째 인생을 열었다고 전했다. 지난달 초 유도 강좌에서 10~70대 여성 31명이 참가해 고노이에게 업어치기 등을 배웠다.

유도 강좌에서 참가자들과 훈련하고 있는 고노이 리나(오른쪽 앞줄 끝). 사진 트위터 캡처

유도 강좌에서 참가자들과 훈련하고 있는 고노이 리나(오른쪽 앞줄 끝). 사진 트위터 캡처

강좌에서 참가자들과 겨루며 100번 이상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는 "몇 번이고 쓰러져도 일어서는 것의 중요성을 유도에서 배웠다"면서 "우울해도, 두들겨 맞아도 다시 일어서겠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8월에 있을 전(全) 일본 유도 개인 선수권 대회 출전을 목표로 훈련 중이라고 한다.

그에게 지도자의 길을 권한 종합격투기 선수 오미가와 미치히로(小見川道大·47)는 "재판 등이 아직 남아 있어 투쟁은 계속되겠지만, 그의 인생은 (피해자의 인생으로)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고 격려했다.

'고노이 사건' 마중물…현역 자위대 女대원 국가 상대로 1억 손배소

지난달 27일 항공자위대 소속 현역 여성대원 A씨는 동료 대원에게 성희롱 피해를 입은 사실을 알고도 자위대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며 정부에 1168만엔(약 1억1332만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A씨는 2010년 오키나와(沖縄) 나하(那覇)기지에 배치된 이래 동료로부터 "애를 잘 낳을 것 같이 생겼다", "남친이랑 관계하느라 업무를 소홀히 하지 말라" 등 심각한 성희롱성 발언을 들으며 생활했다.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던 그는 2016년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가해자를 제소했다.

그러나 나하지법은 2017년 "직장 내 발언으로 부적절하다"면서도 국가공무원이 업무 중에 타인에게 끼친 손해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며 A씨 소송을 기각했다. 이에 A씨는 항공자위대에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한편 가해자와 업무적으로 마주치지 않게 분리 조치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A씨와 가해자는 5년간 업무상 접점이 있어 일하다 엮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부대에서 배포되는 성희롱 교육 문서에 A씨 실명이 기재된 일도 있었다. 방위성은 이날 마이니치에 "관계 기관과 검토해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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