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세컷칼럼

윤 대통령이 호통칠 대상은 따로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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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은행·통신사 등 연일 기업 때리기
정작 정부의 실패 ‘로톡’엔 침묵
기업 탓 전에 정부 역할 돌아보길

혁신은커녕 지난 수십 년간 땅 짚고 헤엄치기 식 이자놀이만 즐기다 국민 욕받이가 된 은행 편들 생각은 없다. 아무리 내수산업이라지만 대놓고 배짱 장사 하는 통신사도 밉긴 마찬가지다. 외국 항공사에 비해 쌓기도 쓰기도 힘든 마일리지 제도만으로도 화나는데, 이미 공들여 쌓은 마일리지의 값어치를 뚝 떨어뜨리는 개편안을 소급 적용하겠다는 항공사는 더 말해 뭐할까. 소비자 눈높이에서 볼 때 선량한 이윤 추구라고 두둔하기엔 이들 기업의 도가 지나쳤다.

 "은행은 공공재적 시스템"(1월 30일)으로 시작한 윤석열 대통령의 기업 때리기 발언이 "은행 고금리로 국민 고통 크다"(13일)를 거쳐 "금융·통신은 이권 카르텔"(15일)이라는 거친 표현으로 강도를 더해가는 데는 이처럼 돈벌이에 혈안이 된 일부 독과점 기업들의 호구 노릇 하다 임계치에 다다른 국민 불만이 자리 잡고 있다. 대통령 발언을 신호탄으로 각 부처 장관들까지 나서서 아무 거리낌 없이 연일 기업을 윽박지르는 배경이다. 주요 타깃이 된 은행·통신은 물론이요, 코로나 19로 존폐 기로에 놓였던 항공사도 비껴가지 못한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대한항공 마일리지 개편을 비판했던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눈물의 감사 프로모션을 하지는 못할망정"이라며 무슨 시민단체나 할법한 감정적 비판을 이어간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은행은 대출금리를 낮추고, 통신사는 싼 요금제를 내놓고, 실세 장관의 분노를 산 항공사는 마일리지 개편안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으니 당장 혜택을 본 국민은 "속 시원하다"며 박수를 친다. 모두 환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근본적 해결책 없는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은 시장경제 원칙을 역행하는 포퓰리즘'이라는 식의 국민 정서와 거리가 먼 원론적 비판은 굳이 안 하련다. 기업과 시장을 존중하는 대신 '선의로 포장한 반(反) 자본주의적 정책 독주를 일삼아 각종 부작용을 낳았던 지난 문재인 정부와 뭐가 다르냐'는 문제 제기도 일단 접어두겠다.

 하지만 이해당사자 간 조정 역할은 고사하고 이익단체의 위법 행위조차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고 수수방관한 탓에 결국 존폐 위기에 몰린 변호사판 '타다'인 법률 플랫폼 서비스 '로톡'을 보고 있자니 정부가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대통령실이 기업 때리기 명분으로 앞세웠던 혁신이나 국민 편의라는 측면에서 봐도 로톡 관련한 정부의 행보는 문제가 있다. 또 여러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전 정권 탓" 역시 이번 사안에서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인 지난해 5월 헌법재판소가 로톡 광고를 금지한 대한변호사협회(변협)의 새로운 광고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뒤에도 공정위·법무부 등 주무부처는 1년 가까이 판단을 미루거나 방치했고, 그 과정에서 로톡은 제대로 사업을 영위하기 어려울 만큼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로톡을 운영하는 로앤컴퍼니는 변협의 세 차례 고발 등 법적 분쟁에 대응하기 위한 법률 비용만 10억원 이상 쓰는 등 기존 변호사업계와의 갈등으로 인한 누적 적자가 100억원에 달하면서 지난 17일 직원 절반 감원을 목표로 희망퇴직 접수에 나섰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정부가 제때 개입했더라면 구조조정은 없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터무니없는 불만이 아니다. 공정위가 부당행위와 관련해 변협 제재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낸 게 벌써 지난 2021년 11월이다. 신속하게 결정해도 모자를 판에 공정위는 오히려 제재 여부와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전원회의 기일 지정을 "변협 요청"이라며 이례적으로 계속 연기해 1년을 넘겼다. 오늘(23일)로 예정된 전원회의에서 설령 법정 최고 과징금(20억원)이 변협에 부과된다 한들 로톡 입장에서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손해만 남았을 뿐이다.

 법무부도 마찬가지다. 법무부는 변협 감독기관으로, 법령에 어긋나는 결의를 취소하거나 부당한 징계는 철회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간 갈등 국면에서 관리·감독에 나서지 않았다. 변협의 징계에 대해 이의신청하면 변호사법상 법무부 징계위원회는 90일 이내에 징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로톡 측은 90일(3월 8일) 이전이라도 빨리 판단을 내려달라고 계속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애타는 건 그저 기업뿐이다. 이 사안과 관련해 한동훈 장관이 "현 단계에서 법무부가 특정한 입장을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답해온 걸 보면 신속한 결정은커녕 아예 결정 자체를 미룰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의 "영업사원" 운운이 립서비스인 줄은 알았지만 왕조도 아닌데 대통령이 누굴 희생양 삼아 제왕적으로 호통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꼭 필요하다면 그 대상은 기업이 아니라 기업 발목 잡는 정부가 돼야 하지 않을까.

 글=안혜리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