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이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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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1416년 1월 태종은 왜구에 잡혀 유구(오키나와)에 팔려간 조선인이 많다는 보고를 받고 대책을 논의토록 했다. 호조판서 황희는 반대했다. 유구까지 거리가 멀고 뱃길이 험할 뿐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한양에서 유구까지는 직선거리로 1267㎞. 대한해협 등 비교적 가까운 바다만 건너면 되는 대마도나 규슈와는 달리 먼 바다를 항해해야 했다. 하지만 태종은 쇄환사를 보내기로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귀한 가문의 가족이 그곳으로 끌려갔다면 번거로움과 비용을 생각지 않고 사람을 보내 데려오려고 하지 않겠느냐.”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이때 유구로 파견된 이예는 마음 아픈 사연이 있었다. 울산의 중인 출신인 그는 8세 때 왜구에 의해 어머니가 납치됐다. 1400년 그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사신을 따라 대마도로 가서 집집이 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태종의 눈에 띈 그는 이후 40여년간 외교관으로 활약했고, 40여 차례 조선-일본을 오가며 조선인 667명을 쇄환했다. 이때도 험한 뱃길을 뚫고 유구까지 가서 포로 44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저들의 사정이 남의 일 같지 않았으리라.

2년 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월북 시도’라던 결론이 최근 뒤집혔다. 당시 청와대가 첫 보고를 받았을 때는 A씨가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국민의 생명을 구해야 할 정부는 어떤 ‘번거로움’과 ‘비용’을 생각했던 것일까. 유족의 정보 공개 요구에 “아무것도 아닌 일” “북한에 사과받았으니 마무리된 것”이라는 대응에 당혹스러운 국민이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