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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은식이 고발한다

2016년 文 버렸던 광주, 2022년엔 이재명·민주당 비토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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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후보로 뛴 호남 지역 광역단체장 후보들. 왼쪽부터 주기환(광주광역시), 이정현(전남도지사), 조배숙(전북도지사) 후보. 모두 15% 넘는 득표를 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6·1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후보로 뛴 호남 지역 광역단체장 후보들. 왼쪽부터 주기환(광주광역시), 이정현(전남도지사), 조배숙(전북도지사) 후보. 모두 15% 넘는 득표를 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1996년,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이 두 형 이야기를 했다. 첫째 형은 사법고시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학생운동 전력으로 검사 임용에 탈락했고, 대기업에 들어간 둘째 형은 승진을 못 해 결국 광주로 돌아와 중소기업에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광주 출신은 서울에서 하숙집 얻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로 이어졌고, 5·18 때 시신을 본 경험담을 말하다가 울먹였다.

같은 해 총선에선 노무현 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낸 '호남 천재' 천정배와 목포고 동기인 아버지가 당연하게도 새정치국민회의(구 더불어민주당)를 열렬히 성원했다. 나도 따라 응원했다. 전라도는 김대중의 국민회의가, 충청도는 김종필의 자민련이, 경상도는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석권한 뒤 수도권 탈환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마치 내가 즐겨 하던 온라인 삼국지 게임을 보는 듯했다. 어린 나에게 국민회의는 호남인 한을 풀어주고 대한민국을 개혁할 정의로운 군대였다.

2000년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은 수능 공부보다 더 중요하다며 노래 한 곡을 가르쳐줬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5·18 노래였다. 그렇게 아버지 세대의 아픔이 내게 대물림이 됐다.

호남 출신 많은 계양에 깃발꽂은 이재명 

광주 금남로에 뿌려진 붉은 피를 사진으로만 본 세대이기 때문일까. 대학에 진학해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붉게 물들었던 사상이 점점 옅어져 갔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대한민국 건국 및 산업화 과정에 대한 긍정적인 역사 인식을 갖게 됐다. 그러다가 급기야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서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호남 출향민과 호남 서민을 위해 싸워줄 ‘군대’가 되어주기는커녕 기득권 세력이 돼버린 탓이다. 특히 나처럼 가정을 만들고 책임져야 할 2030 남성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 실패로 인한 집값 상승은 지지 철회를 넘어 분노하게 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내세운 대선후보는 광주 시민이 붉은 피를 흘리던 때 화염병 한 번 던져보지 않은 범죄자이자 대장동 비리 의혹을 받는 이재명 전 경기지사였다. 심지어 대선에 패한 지 불과 두 달 뒤에 다시 이재명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의 정치적 고향 성남을 벗어나 호남 출향민이 많아 민주당이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던 인천 계양구에서 출마했다. 출마 명분이 부족한 탓인지 예상과 달리 정치적 무명인 동네 의사를 상대로도 고전하다가 김포공항 폐항이라는 황당한 공약을 내놨다.

MBC 예능 프로그램 '나혼자산다'의 로고에 이재명 후보의 얼굴을 합성한 그래픽. [트위터 캡처]

MBC 예능 프로그램 '나혼자산다'의 로고에 이재명 후보의 얼굴을 합성한 그래픽. [트위터 캡처]

5선을 한 계양을 이재명에게 내주고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송영길은 더 황당한 공약을 내걸었다. 뜬금없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도움을 받아 서울에 유엔 아시아 지부를 설립하겠다는 거였다. 과거 민주당의 '양념질'과 불법 여론조작 피해를 본 반 전 총장을 두 번 죽이는 거였다. 어떻게 저렇게 염치가 없을까? 서울 시민 상당수가 구청장은 민주당 후보를 찍으면서도 서울시장은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를 찍는 교차투표를 한 건 이런 반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송영길 불신임한 서울 교차 투표 

안타깝게도 호남 출신 4050 세대만은 달랐다. 민주당의 정책 실패로 각종 경제적 불이익을 당했어도 국민의힘에는 표를 주지 않았다. 대화해 보면 확고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는데, 그래도 국힘은 아니야"라는 말만 돌아왔다. 전라도에서 민주당이 석권하고 호남 출향민이 많이 거주하는 경기도와 인천 계양에서 민주당이 선전한 데는 이런 콘크리트 지지층의 결집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선거 결과는 전처럼 다시 호남을 고립시켰다.

일부 강성 여권(국민의힘) 지지자들은 호남 비하로도 모자라 차라리 독립해 살라는 과격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역으로 묻고 싶다. 2018 총선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은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승리했는데, 그렇다면 대구·경북은 독립해 따로 살았어야 하나?

2020년 GRDP(1인당 지역내총생산)를 보면 대구가 꼴찌, 부산이 꼴찌에서 2등, 광주가 꼴찌에서 3등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방 권력을 한 정당이 독점하면서 빚어진 퇴보다. 경제 상황이 악화하니 인구 부족과 투자 부재의 악순환으로 전라도·경상도의 많은 도시가 소멸해간다. 서로 힘을 합쳐 해결책을 찾아도 모자랄 판에 누가 누구보고 따로 떨어져 살라 비난한단 말인가? 현실정치는 삼국지 게임처럼 전쟁과 섬멸의 대상이 아닌 타협과 연대의 대상이지 않은가?

"아따! 꼴도 보기 싫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전통적으로 높은 투표율을 보여온 광주가 37%라는 이번 지방선거만큼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해 화제다. 하지만 난, 아니 광주 사람들은 이미 사전투표 날 이런 결과를 예견했다. 이날 광주에서 만난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따! (민주당) 꼴도 보기 싫다!"를 외쳤다. 대선 패배에 대한 반성 없이 나 혼자 살기 위해 명분 없는 출마를 감행한 이재명 후보, 그리고 내분으로 시끄러운 민주당을 모두 불신임하는 표시로 투표장 가기를 포기한 것이다. 문재인 당시 상임고문에 대한 비토로 민주당이 호남에서 완패한 2016년 총선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호남은 과거 이 지역 출신 김대중뿐 아니라 노무현을 전폭 지원해 당선시킴으로써 노무현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호남의 이런 선택이 꼭 진보 정당만 향하는 건 아니다. 2016년 총선에선 안철수의 국민의당을 전폭 지지했고, 이명박 정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정운천(전주)과 박근혜 전 대통령 최측근 이정현(순천)을 당선시켰다. 보수정당이라도 호남의 선택을 받은 정치인이 주도적으로 지역과 나라의 발전을 이끄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는 얘기다. 국민의힘이 이런 호남의 마음을 읽어 복합쇼핑몰 공약 같은 지역 밀착 공약을 개발해낸다면 충분히 호남에서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광주 광역의회 비례대표로 당선된 국민의힘 김용님 당선자. [뉴시스]

지난 지방선거에서 광주 광역의회 비례대표로 당선된 국민의힘 김용님 당선자. [뉴시스]

이번 지방선거가 그런 가능성을 보여줬다. 국민의힘이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하며 정의당을 밀어내고 2당으로 도약했다. 비록 단체장 출마자는 한 명도 당선하지 못했지만 광주에서 비례로 시의원이 1명 당선하는 등 주목할만한 변화가 있었다. 무소속 지역 일꾼이 대거 출마한 전남이 광주와 달리 전국 최고 투표율을 나타낸 것도 대안 세력이 나와주기 바라는 속내가 투영된 결과라고 본다.

대안 세력 기다리는 호남 

‘지역’이라는 민감한 단어에 ‘감정’이라는 더 민감한 단어가 붙었다는 것만 봐도 지역감정은 쉽게 해소하기 힘들다는 걸 알 수 있다. 큰 트라우마로 호남인들 마음속에 물든 붉은 피가 다 씻겨 나가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트라우마가 미래세대에 대물림되진 않았으면 좋겠다. ‘금남로에 뿌려진 붉은 피’처럼 호남이 겪은 아픔과 소외에 대한 역사 교육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부분만 강조하다 보면 어린이들의 백지 같은 마음에 특정 정파의 가치만 주입돼 지역 정치권력의 독점 구조를 깨기 어렵다. 정치인들이 서로 경쟁하며 실생활의 문제를 해결해줄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지역민이 더 잘살게 되고 원한과 증오의 마음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남북전쟁 시기 미국에선 북부의 공화당, 남부의 민주당이 지배적 정치권력을 형성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반대의 정치지형이 형성됐다. 이런 역동적 정치권력 지형의 변화는 정당 간 경쟁을 촉발하여 나라 발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호남은 5·18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보수 정당을 지지했었고 오히려 대구 쪽이 진보 성향이 강한 곳이었다. 우리도 미국처럼 역동적 변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