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재련이 고발한다

"찍히지 않게 조심해라"…위안부 피해 할머니 이용하는 그들

중앙일보

입력

김재련 변호사

나는 고발한다. J’Accuse…!’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수요집회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앞 사진은 윤미향 정대협 대표와 관련해 문제 제기를 한 이용수 할머니. 그래픽=김은교

수요집회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앞 사진은 윤미향 정대협 대표와 관련해 문제 제기를 한 이용수 할머니. 그래픽=김은교

지난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과정에서 외교부가 당시 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현 무소속 국회의원)와 수차례 면담한 사실이 최근 확인되었다.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한변)이 '동북아국장-정대협 대표 면담 결과' 등 4차례 면담 내용을 적은 4건의 문건을 공개한 것이다. 앞서 지난 2020년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합의 당시 10억엔이 일본에서 오는 걸 (윤미향) 대표만 알고 있었다"고 폭로했지만 윤 의원은 줄곧 이를 부인해왔다. 문건에 '10억엔 출연' 내용이 명시되어 있음에도 여전히 윤 의원은 사전에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실공방과 별개로 꼭 짚어야 하는 얘기가 있다. 합의 당시 생존 위안부 피해자는 총 47명이고 관련한 다른 시민단체도 있었는데 외교부가 합의 내용을 미리 설명한 사람은 윤 의원이 유일했다. 결국 지금까지 논란이 이어지는 본질은 윤미향의 과(過) 대표성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당시 정부(외교부)가 피해자 모두의 의사를 아우르는 대표성이 없는 인물에게 과도한 대표 자격을 부여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라는 얘기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이용수 할머니의 문제 제기 전까지 위안부와 관련한 정대협의 활동은 이견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성역이었다. 위안부 일을 담당하는 공직 생활을 하면서 이 문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명히 보여준다고 느꼈다.

한변이 공개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면담 내용을 담은 문건. 합의 전날 윤미향 당시 정대협 대표를 만나 일본의 10억엔 출연 내용을 전달했다고 되어 있다. [사진 한변]

한변이 공개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면담 내용을 담은 문건. 합의 전날 윤미향 당시 정대협 대표를 만나 일본의 10억엔 출연 내용을 전달했다고 되어 있다. [사진 한변]

지난 2013년부터 2년간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장으로 근무할 당시 여가부 간부들은 나를 ‘위국장’이라 부르곤 했다. 권익국 업무 가운데 하나인 ‘위안부 피해자 지원’에 적극적이라며 붙여준 별칭이었다. 실제로 2013~14년 조윤선 장관과 함께 당시 국내 생존 피해자 50분을 모두 만났다. 피해자별 1인 다큐멘터리와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제작을 지원했으며, 프랑스 앙굴렘 만화 페스티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할머니들은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가족과 사회, 국가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채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생존 할머니 한 분이 조 장관 만나길 꺼린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전화 통화를 했다. 장관 만났다가 온 동네에 위안부 피해자라는 소문이 났다는데 본인도 그런 일을 겪을까 봐 겁이 난다는 거였다. 큰일이다 싶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조처를 해야 했다. 그 할머니한테 그런 말을 전한 시민단체 활동가에게 확인했더니 사실이 아니었다. 장관이 피해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 누군가가 정부와 할머니들 사이를 이간시킨 거라 짐작했다.

지난 2013년 조윤선 당시 여성가족부 장관이 충북 보은에 사는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를 찾았다. [연합뉴스]

지난 2013년 조윤선 당시 여성가족부 장관이 충북 보은에 사는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를 찾았다. [연합뉴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간담회에서 한 위안부 관련 단체 인사는 "할머니 지원 예산은 이제 충분하니 단체 지원 예산을 확대해 달라"고 요구했다. 황당했다. 정말 할머니들을 위한 지원이 충분하다면 이 단체는 왜 할머니들을 위한다며 모금하고 팔찌 같은 걸 만들어 판매하고 있을까. 그래서 "수익금은 어디에 사용하고 있느냐?"고 묻자 "왜 묻느냐"며 불쾌해했다. 그 당시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 대표는 장관조차 눈치를 볼 정도로 위세가 높았다. 오죽하면 간담회가 끝난 후 담당 직원한테 "앞으로 그런 질문 해서 찍히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조언을 들을 정도였다.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정부 요청에 의해 화해치유재단 이사로도 활동했다. 합의문 내용을 피해 할머니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개별 방문을 시도했는데 방문이 성사되지 못한 두 곳이 각각 정대협과 나눔의 집이 운영하는 쉼터였다. 공문을 보냈더니 한 단체는 할머니들이 면담을 원하지 않는다는 회신을 보내왔고 또 다른 단체는 회신조차 없었다. 결국 두 쉼터의 할머니들에게는 직접 설명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런데 그 후 한 할머니가 외교부 앞에서 시위하며 화해치유재단 사람들을 만나 본 적도, 한마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인터뷰한걸 봤다. 할머니 의사라며 면담일정조차 안 잡아주던 단체들과 상반된 입장이었다. 피해 할머니들 중에는 단체 관계자 몰래 화해치유재단으로 연락해 일본 정부 위로금을 수령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분도 있었다. 할머니를 내세운 단체들 입장이 할머니들의 진짜 의사와는 달랐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현 무소속)은 지난 2020년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대표 기간에 불거진 부정 의혹 등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김경빈 기자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현 무소속)은 지난 2020년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대표 기간에 불거진 부정 의혹 등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김경빈 기자

내가 국장으로 일했던 2013년에 생존 할머니들 평균 연령은 이미 80세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그런데 윤 의원을 비롯해 그 시절 위안부단체 들은 고령의 할머니를 모시고 해외출장을 다녔다. 명분은 세계에 실상을 알린다는 것이었지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학자나 시민들이 국내에 와서 피해자 목소리를 듣도록 하는 게 할머니들 인권에 더 부합하지 않았을까? 수요집회도 마찬가지다. 인권운동가로 거듭난 할머니들의 지속적 참여와 그런 할머니들을 지지하는 시민이 동참하는 수요집회는 그 자체로 세계가 기억할만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팔순 넘은 피해 할머니들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여름 한겨울에도 한 시간씩 밖에 앉아 있게 하는 건 단체는 물론 시민도 말렸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건강한 젊은 사람도 혹서와 혹한에 1시간씩 길거리에 앉아 있는 건 힘든 일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전시 성폭력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 역사적 비극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여야 입장이 다를 수 없고, 정부와 시민단체 입장이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특정 진영, 몇몇 시민단체에 독점화되어 있었다. 역사의 사유화였고, 피해자들의 도구화였다고 생각한다. 참상을 겪을 당시에도 가족·사회·국가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는데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21세기에도 여전히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채 누군가의 직업을 위해, 누군가의 권력을 위해, 누군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부끄럽고 죄송한 일이다.

지난 2016년 1월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016년 1월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할머니들을 만나보면 생각이 각기 다르다. 원한이 피에 새겨져 있다는 할머니도, 이제는 용서하고 싶다는 할머니도 있었다. 위안소에서의 기억이 너무 끔찍해서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리느니 독약 먹는 게 낫겠다는 할머니도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피해자 의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정치적 잣대로 인권운동가로 내세우거나 거꾸로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사례를 많이 봤다. 입으로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우면서 피해자를 주변화하고, 정의와 인권을 내세우면서 역사를 사유화하고, 인권을 내세우면서 피해자를 도구화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피해 할머니들이 진정한 위안에 이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인권은 한 줌 권력과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그들이 그리고 우리 모두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