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중앙은행 총재, 선한 자본주의 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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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호 20면

초(超)가치

초(超)가치

초(超)가치
마크 카니 지음
이경식 옮김
윌북

“책 일부는 금융계의 유능한 ‘인싸’가 아니라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대가 쓴 것 같다.”

마크 카니가 쓴 이 책(원제 ‘Value(s): Building a Better World for All’)이 지난해 3월 발간되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이렇게 평했다. 카니는 2008~2013년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를, 2013~2020년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 총재를 지냈다. 캐나다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에 잘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덕에 영국에 ‘스카우트’까지 됐다. 1694년 영국 중앙은행 설립 이후 총재직에 비영국인이 임명된 건 그가 처음이었다.

FT가 카니를 월가 시위대에 빗댄 건, 제어되지 않는 시장 근본주의에 대한 저자의 비판 때문이다. “모든 이념은 극단으로 치닫게 마련이며, 자본주의 역시 시장이 가진 힘에 대한 믿음이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절제력을 잃어버린다.”

시장 근본주의는 필요한 규제마저 줄여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저자가 가장 값비싼 네 단어 영어라고 한 “이번에는 다를 거야(This time is different)”를 비롯해 “시장은 언제나 옳아” “시장은 도덕적이야” 같은 금융의 세 가지 거짓말에 당국자와 시장참여자는 속아 넘어갔다. 금융이 공정, 통합, 신중함, 책임감이라는 핵심가치를 놓쳐버린 게 위기의 근본원인이었다고 저자는 썼다.

시장이 모든 것의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카니는 시장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장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기후변화처럼 인류가 직면한 큰 도전을 해결하려면 시장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그가 원하는 시장은 이기심만 있는 시장이 아니다. 저자는 “시장은 (열정, 이성, 이타주의 등 많은 것이 포함된) 인간성을 증류한 것”이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인용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으로, 선한 자본주의로 돌려놓자고 주장한다.

유명인사 어록 인용이나 맛깔스러운 비유가 많다. 금융에서 신뢰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신뢰는 올 때는 걸어서 오지만 갈 때는 페라리를 타고 간다”고 쓰는 식이다. 불확실성에 솔직해질 때 오히려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며 작가 앙드레 지드를 인용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믿되, 진실을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의심하라.”

800쪽에 달하는 ‘벽돌책’ 분량 탓인지 책 일부 번역이 좀 불친절하다. 가치와 화폐의 경제사상사를 정리한 1부만 200쪽이 넘는데 아리송한 대목이 여럿이라 원문이 궁금했다. 1부만 참고 넘기면 2부와 3부는 부드럽게 읽힌다. 내용상으로도 1부를 건너뛰고 읽어도 무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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