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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기업] [기고] 산업정책과 중소기업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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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중소기업육성대책요강을 발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중소기업 정책으로 경제정책의 기본 방침을 중소기업 육성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소기업은 법적 정의가 따로 없었다. 그냥 모든 기업을 통칭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1964년 중소기업중점육성정책이 발표됐다. 박정희 정부 시절이다. 이 육성정책은 이름과 달리 산업화를 위한 대기업 정책에 가까웠다. 전문업종을 추진했는데 중소기업 참여 업종과 대기업 참여 업종을 구분했다. 만약 대기업 전문업종에 중소기업이 있다면 업종전환을 지원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수출 주력업종을 육성하는 것이 정책의 핵심이었다. 육성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1966년 중소기업기본법을 제정했다. 드디어 중소기업은 중소기업이라는 법적인 이름을 갖게 됐다.

그러나 중소기업 정책은 산업정책의 일부에 불과했다. 당시 산업정책의 핵심 전략은 대기업이 중화학공업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것이었다. 중소기업은 그런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을 주로 생산했다. 겉으로 보면 수평적으로 맺어진 상호보완 관계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수직적으로 맺어진 하청관계에 불과했다. 정부는 1975년 계열화촉진법을 만들어 이를 뒷받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열화는 더디게 진행됐다. 대기업은 풍부해진 외국자본으로 직접 계열사를 설립하거나 중소기업을 인수했다. 그럴수록 대기업은 더욱 커졌고, 중소기업은 자금난과 경영난을 겪었다. 지금 말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1970년대 후반 극에 달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러한 격차에 주목했다. 그는 정의라는 단어에 몹시 집착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정의롭지 못하다고 인식했다. 제5공화국은 1980년 8차 개헌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헌법에 넣었다. ‘국가는 중소기업의 사업활동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

지난 40여 년 동안 보호·육성은 계속됐다. 그동안 경제 규모가 커졌으나 제조 중소기업의 납품의존도는 여전히 80%를 넘는다. 여기에 보호·육성이 더해지니 하도급법에 상생법까지 생겼다. 이마저도 관련 부처가 달라 뭐 하나 해결된 것이 없다. 그저 정책이 하나둘씩 더해질 뿐이다.

지금 한국경제는 심각한 위기다. 코로나19 때문은 아니다. 잠재성장률은 OECD 최저 수준이고, 새로운 산업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정부는 DNA(데이터·네트워크·인공지능)에 20조9000억원을 투자하고, Big 3(미래차·반도체·바이오)를 위해 석·박사 2358명을 양성하려고 한다. 과거 우리가 행했던 대기업 중심의 산업정책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이리도 혹독한 양극화를 경험해놓고, 이걸 되풀이한단 말인가.

산업정책, 기업정책 그리고 시장경제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각자 원하는 방식으론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먼저 대기업 중심에서 중소기업 중심으로 산업정책을 개편해야 한다. 그리고 가만히 두면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은 기업에 맡기자. 굳이 정부가 나설 필요가 없다. 정부는 속도가 느려 시장을 쫓을 수 없다. 정부는 시장과 기업에 귀 기울이고, 이들이 불편하다고 하는 것만 신속하게 해결해주면 된다.

중소기업도 더는 보호·육성에 기대선 안 된다. 시장에서 날 선 경쟁이 살아 있어야 하고, 현장에서 뜨거운 기업가정신이 샘솟아야 한다. 보호·육성은 어디까지나 창업, 기술, 폐업에 국한해야 한다. 경쟁과 기업가정신이 역동적인 창업을 이끌고, 스타트업과 벤처가 소기업, 중기업,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이어지는 생태계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생태계가 기업정책이고, 기업정책이 산업정책을 대신해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

오동윤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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