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문장으로 읽는 책

장류진 외 『여행하는 소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여행하는 소설

여행하는 소설

“여행 경험이 많진 않지만 전부터 비행기 표 알아보는 걸 좋아했다. 앞으로 절대 가 볼 일 없고, 가 보지 못할 나라라도 그랬다. 직장 일로 영혼이 어둑해지거나 인간에게 자주 실망할 때면 혼자 이국의 낯선 도시를 검색해 보곤 했다. 태블릿 피시와 다정히 얼굴을 맞댄 채 열대지방 햇볕 쬐듯 전자파를 쬐었다.”

장류진 외 『여행하는 소설』

일상이 막히고 여행이 귀한 경험이 된 시절에 맞춤한 소설집이다. 일곱 명의 작가가 여행을 소재로 썼다. 위 인용문은 김애란의 소설 ‘숲속 작은 집’의 일부. 해외여행 중 메이드에게 팁을 주는 문제로 고민하는 얘기다.

“하루오는 전에 없이 길고 깊은 잠을 잤다. 깨어 보니 낯선 방이었다. 몇 겹의 삶이 지나간 듯 오래 잔 느낌이었다. 그 아침,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하루오는 어쩐지 바다 밑바닥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고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햇살이 있었고, 자동차들이 무수히 지나다녔고, 매연이 뒤섞인 찬 공기가 창문으로 밀려들었다. 하루오는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던 것이다.”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의 일부다. 일본인 하루오는 부산 남포동 모텔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에 “도를 믿느냐”는 기이한 질문을 받고 “기이하게도 죽고 싶었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건, 나란 존재가 5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진 것 같은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짐 싸고 싶어지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