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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도 감탄한 北 '제재 내공'…고대 그리스 '메가라 법령' 약발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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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루블화를 서울의 한 시중은행에서 외환딜러가 계수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이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루블화의 가치는 폭락했습니다. 연합뉴스

러시아 루블화를 서울의 한 시중은행에서 외환딜러가 계수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이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루블화의 가치는 폭락했습니다. 연합뉴스

은행에 달러가 있어도 인출할 수가 없고, 돈을 내겠다고 해도 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가 없고, 아이가 먹고 싶다고 칭얼대는 맥O날드 햄버거를 사러 갔는데 문을 아예 닫았다면?

러시아 국민이 현재 처한 상황입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상응 조치로 내린 경제 제재 및 그 맥락에서 이뤄진 여러 조치 때문이지요. ‘제재’라는 두 글자에 러시아는 디폴트, 즉 국가부도 사태 우려까지 언급되는 판입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2017년 중국에서 개최된 브릭스(BRICS, 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ㆍ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경제 5개국) 정상회의에서 했던 말을 보실까요.

“(대북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은 풀뿌리만 먹더라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북한 편에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푸틴은 제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북한은 러시아에 있어서 제재의 대선배 격입니다.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실험에 대해 유엔과 미국 재무부가 내린 제재는 워낙 촘촘해서, 당국자들 사이에선 “라이터 하나도 북한에 갖고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입니다. 미 재무부에서 제재를 전담하는 해외자산통제실(OFAC) 대북 제재 담당자들을 2017년 워싱턴DC 그들의 일터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들의 사무실 곳곳에 쌓인 수많은 자료와, 담당 남녀노소 관료들의 해박한 지식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14일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하는 의미로 러시아에서 철수한 맥도날드의 모스크바 체인점. 유리창에 대통령궁인 크렘린의 일부가 비춰지고 있네요.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4일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하는 의미로 러시아에서 철수한 맥도날드의 모스크바 체인점. 유리창에 대통령궁인 크렘린의 일부가 비춰지고 있네요. 로이터=연합뉴스

제재는 사실, 기축통화가 미국 달러인 이 지구촌에서, 미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일 겁니다. 북한뿐 아니라 이라크ㆍ이란 등이 제재의 쓴맛을 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재의 실효에 대해선 여러 회의론적 시각이 존재합니다. 미국 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의 국제문제 전문 기자인 로빈 라이트(여성입니다)가 지난 7일 쓴 기사엔 ‘제재가 너무도 자주 실패하는 까닭은’이라는 제목이 달렸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원하는 만큼 프랑스 보르도 고급 와인을 쟁일 수는 없겠지만, 북한 체제는 버티는 중입니다. 뉴요커에 로빈 라이트가 있다면 중앙일보엔 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이 있는데요, 유 팀장이 2018년 캐낸 바에 따르면 금강산과 멀지 않은 마식령 스키장엔 제재 망을 뚫고 북한이 들여온 고가의 명품 장비들이 즐비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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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식령 스키장은 김정은 위원장의 ‘최애’ 장소 중 하나죠. 라이트 기자는 뉴요커에 “대북 제재는 완벽한 실패”라고 못 박았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당시 국방위 제1위원장)이 2013년 12월 완공된 마식령스키장의 리프트를 타고 슬로프를 오르는 모습. [중앙포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당시 국방위 제1위원장)이 2013년 12월 완공된 마식령스키장의 리프트를 타고 슬로프를 오르는 모습. [중앙포토]

물론 제재는 미국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도시국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가 이웃 도시국가의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 제재를 가한 적이 있다는군요.

역사 문헌 등을 더 파고 들어봤더니, ‘메가라 법령(Megarian Decree)’이라는 것이 역사에 기록된 첫 경제 제재라고 합니다.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32년 내린 조치인데, 아테네의 전령이 인근 도시국가 메가라에서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성이었다고 합니다. 메가라의 상인들은 아테네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수 없도록 하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이 조치를 어기면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가 격노할 것이라는, 당시로선 어마무시한 언급도 들어있었죠. 메가라가 주목적이 아니라,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경쟁 구도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경제제재를 취한 인물입니다. [중앙포토]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경제제재를 취한 인물입니다. [중앙포토]

다시 뉴요커로 돌아와서, 라이트 기자는 경제제재가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는 여러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북한이고, 그 밖에도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도 여전히 집권 중이고 쿠바 역시 1960년대부터 이어진 미국의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건재하다”고 적었습니다. 물론, 실효가 제로인 것은 아닙니다. 미국 외교협회(CFR)의 관련 전문가인 벤 스틸은 라이트에게 “경제제재가 큰 효과를 거두기는 것은 이례적이지만, 실효를 거둘 때가 있기도 한데 문제는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린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틸 수도 있고, 경제제재로 고통을 받는 것은 결국 무고한 일반 시민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권력자들이 독재로 권력을 연명시키고, 고난의 행군을 일반 대중들에게 강요한다면 경제제재가 그 정권의 실각으로 즉효를 거두긴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결국 피해를 보는 건 맥도널드를 먹고 싶지만 못 먹는 러시아 어린이와, 프랑스 파리로 허니문을 가고 싶지만 꿈도 못 꾸게 됐을 러시아의 신혼부부가 아닐까요. 북한 주민들이 먹고 싶은 건 풀뿌리가 아니라, 김일성이 수십년 전부터 약속한 '이팝(쌀밥)에 고깃국'일 겁니다.

이번 주도,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국내 체류 중인 우크라이나인들이 지난달 서울 중구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있습니다. 뉴스1

국내 체류 중인 우크라이나인들이 지난달 서울 중구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있습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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