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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에만 당한게 아니다, 美 끝까지 약올린 '러시아 능구렁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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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외교장관만 18년 해온 라브로프. 지난 18일 사진이다. AFP=연합뉴스

러시아 외교장관만 18년 해온 라브로프. 지난 18일 사진이다. AFP=연합뉴스

24일로 예정됐던 미ㆍ러 외교장관 회담을 미국이 취소한 건 의미가 크다. 외교가 더이상 우크라이나 사태의 최우선 해결책이 아니라고 미국이 판단 내렸다는 뜻이어서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은 22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회동하기로 했던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았을 때”라며 “이제 미국은 침공이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고 밝히며 회동 취소를 선언했다.

블링컨 장관은 이어 “러시아가 외교적 노력을 완전히 걷어찼다는 확실한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을 회담 취소의 이유로 부연했다. 미국 외교의 얼굴 격으로 베테랑 외교관인 블링컨으로서는 과감히 선을 그은 제스처다. 그러나 상대는 만만치 않다. 러시아 외교의 얼굴 격인 라브로프는 장관만 18년 역임 중인 인물이다. 직업이 장관인 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에게 2020년 “러시아 연방 영웅” 칭호까지 부여했다. 블링컨이 외교 베테랑이라면 라브로프는 외교 능구렁이 정도다.

지난 1월21일 만난 블링컨(왼쪽) 미 국무장관과 라브로프 장관. 이들은 24일 만나기로 했으나 회담은 취소됐다. AP=연합뉴스

지난 1월21일 만난 블링컨(왼쪽) 미 국무장관과 라브로프 장관. 이들은 24일 만나기로 했으나 회담은 취소됐다. AP=연합뉴스

라브로프 장관이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맡은 역할은 분명하다. 러시아 나름으로는 외교적 해법을 최대한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식민지였다”는 요지로 격한 감정을 작정하고 드러냈던 회견은 22일. 그전에 푸틴은 라브로프를 활용해 외교적 해법을 찾는 제스처를 취했다. 14일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푸틴 대통령과 라브로프 장관과의 대화가 대표적 사례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푸틴 대통령에게 라브로프 장관은 “아직은 외교적 해법에 시간을 좀 더 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푸틴이 라브로프에게 “(우크라이나 사태에 있어서) 러시아의 안보 문제를 (외교적) 합의로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먼저 묻고, 이에 대해 라브로프가 내놓은 답이다. 러시아 나름으로는 외교적 노력을 했다는 장치를 한 셈으로 읽을 수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제스처는 똑같지만 생각은 정반대다. AFP=연합뉴스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제스처는 똑같지만 생각은 정반대다. AFP=연합뉴스

라브로프 장관은 푸틴 대통령의 오랜 심복이다.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한 뒤 외교관이 된 라브로프는 영어ㆍ프랑스어 등에 능통하며, 국제사회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다. 외교장관 이전엔 유엔 대표부에서 러시아를 대변하는 대사를 수년간 역임했다.

한반도와 인연도 깊다. 2019년 4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푸틴과 정상회담 직후 샴페인으로 건배를 할 때도 바로 뒷자리에 라브로프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6자회담의 러시아 대표로서도 오랜 기간 활약했다. 6자회담의 북한 측 실세 통역이었던 최선희 현 외무성 제1부상과도 수차례 만났다. 2018년 당시 최선희는 자신의 새로운 미국 측 카운터파트인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방북하자 돌연 러시아로 출장을 떠나 라브로프 등과 회담하기도 했다. 라브로프는 싱가포르(2018년)와 베트남 하노이(2019년)에서의 두 차례의 북ㆍ미 정상회담이 결렬로 끝난 뒤인 2019년 11월 최선희를 만나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미국이 문제”라고 북한을 두둔하기도 했다.

2019년 북ㆍ러 정상회담의 만찬 장면. 맨 왼쪽이 라브로프 장관이다. 그 옆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TASS=연합뉴스

2019년 북ㆍ러 정상회담의 만찬 장면. 맨 왼쪽이 라브로프 장관이다. 그 옆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TASS=연합뉴스

한편 라브로프 장관은 미국 측과의 협상 결렬에 대해선 23일까지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최근 수일간 미국과 적대적 관계인 국가의 외교 수장들과 만나는 등, 분주한 나름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1일엔 시리아와 외교장관 회담을 개최하기도 했다. 미국을 보란 듯 약 올리는 행보다. 그는 같은 날 “우크라이나가 주권국가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하며 푸틴 대통령의 다음 날 회견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나서기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주권국이 아니므로 외교장관으로서 관여할 바 없다는, 장관만 20년 가까이 해온 이의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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