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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노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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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현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예약하고 연락 없이 예약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행위를 ‘노쇼’(No-Show)라고 한다. 일종의 예약 부도다. 국내에서 노쇼가 사회적인 문제로 불거진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국내 외식업계에 고급스러운 음식·서비스를 지향하는 파인다이닝(Fine Dining) 문화가 확산하면서다. 예약 중심으로 운영하는 음식점이 늘면서 노쇼 피해도 커졌다.

현대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2015년 기준 국내 주요 서비스 업종(음식점·미용실·병원·공연장·고속버스)의 노쇼 피해 손실액은 연간 4조5000억원이다. 연관 업체 손실까지 합치면 8조2700억원으로, 이로 인한 고용 손실만 10만8170명에 이른다. 평균 노쇼 비율은 10~20%다. 음식점(20%) 피해가 가장 큰데, 예약 인원에 맞춰 식재료를 준비하고 서빙 등 인력을 충원했다 노쇼가 발생하면 고스란히 손실로 이어져서다.

노쇼는 의료업계에서도 골치다. 2016~2017년 14개 국립대병원의 노쇼 비율은 13.4%다. 병원 경영 손실뿐 아니라 다른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문제까지 생긴다. 고의적 노쇼도 있다. 비행기를 타는 아이돌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팬들이 항공권을 샀다가 이륙 직전에 환불하기도 했다.

반대인 경우도 있다. 2019년 7월 세계적인 축구 선수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친선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당시 주최 측은 ‘호날두 45분 이상 출전’이라고 사전 홍보를 했고, 호날두를 보기 위해 최대 40만원의 관람 티켓을 샀던 팬들은 분노했다. 노쇼 문제가 불거지자 매월 회비를 지불하면 노쇼로 인한 피해액을 보상해주는 업체나 노쇼 피해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변호사도 등장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1일째, 때아닌 에어비앤비 노쇼가 화제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하고 가지는 않는 노쇼가 늘고 있어서다. 다른 점은 숙박비를 결제한다는 점이다. 전쟁으로 아비규환인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직접 기부인 셈이다. 우크라이나의 물가는 한국의 30% 수준이다. 지하철 이용요금이 500원 남짓이다. 일주일의 여행을 포기하고 기부한 숙박비가 그들의 한 달 식비가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남의 일’ 같지 않은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숙박비 결제라는 ‘선한 노쇼’를 경험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