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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나타난 '탈북' 수재의 딸…피란민 필사의 탈출 도왔다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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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일(현지시간)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의 공터에 마련된 구호물자 보급소의 모습. 자원봉사자들과 난민들로 북적이는 모습. 김현기 특파원

1일(현지시간)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의 공터에 마련된 구호물자 보급소의 모습. 자원봉사자들과 난민들로 북적이는 모습. 김현기 특파원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불과 10여㎞ 떨어진 폴란드 접경도시 프셰미실.

김현기 순회특파원, 우크라-폴란드 접경을 가다③

지난 27일 저녁(현지시간, 한국시간으론 28일 새벽) 갑자기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다. 프셰미실시 인근 비샤티체 마을 한 호텔에 임시 사무소를 마련 중인 폴란드 주재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깜짝 놀라 호텔 직원에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다. 호텔 직원도 눈이 휘둥그래져 관계 기관에 다급하게 전화를 돌렸다. 사이렌은 10분 가량 계속됐다. 얼마 지나 "소방차가 지나가기 전에는 원래 마을 전역에 사이렌을 울린다"는 '이해하기 힘든' 설명을 들었다.

국경의 긴장감이 커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27일 오전 폴란드와 접하고 있는 국경에서 30㎞도 안 떨어진 우크라이나 부어지미에르지 지역에 미사일 3발이 떨어졌다. 타깃은 군 부대 창고. 폴란드 국경으로 향하던 우크라이나 난민들도 시커멓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봤다고 한다. 폴란드 쪽에서도 소리가 들렸다는 현지 보도도 나왔다. 개전 이후 폴란드에 가장 인접한 곳에 러시아 미사일이 떨어졌다는 뉴스에 폴란드는 초긴장 상태다. 비유하자면 김포 검단 신도시에 사는 주민이 '국경'인 김포공항에서 30㎞ 동쪽에 있는 압구정역에 미사일이 떨어졌을 때에 느끼는 공포감과 같다.

폴란드 국경지대에는 이 같은 공포감 못지 않게 우크라이나인 피란민에 대한 헌신적 지원이 눈에 띄었다.

현재 폴란드 전국에서 생업을 미루고 자원봉사를 위해 동쪽 국경지대로 몰려 든 인원만 30만 명. 국경 지역에 사는 주민들도 저마다 이불·담요·베개·옷·유모차 등을 가져와 기부하는 모습이 거리마다 이어지고 있다.

1일(현지시간)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 제14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임시 피란민 보호소의 모습. 김현기 특파원

1일(현지시간)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 제14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임시 피란민 보호소의 모습. 김현기 특파원

1일 오전 프셰미실 시내 제14학교 체육관. 국경을 넘어 온 피란민이 하루 혹은 이틀 간 잠시 묵어가는 보호소다. 간이침대에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피란민들이 잠을 자거나 휴대전화를 이용하고 있었다. 체육관 내 스피커에선 "자코파네시로 가시고 싶은 분 버스에 타 주세요" 등의 안내 방송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체육관 한켠에서 식사 배급, 의료품 안내 지원을 하던 알리스(34)는 "다니고 있는 컨설팅 회사(Pwc)에 2주 가량 휴가를 신청하고 이곳으로 달려왔다"며 "국제사회는 피란민 편이라는 것, 모두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따뜻한 수프를 대접받자 피란민 우르바노비치(33)는 "우리는 이런 관대함을 예상하지 못했다"며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1일(현지시간)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 제14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임시 피란민 보호소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알리스(왼쪽). 김현기 특파원

1일(현지시간)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 제14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임시 피란민 보호소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알리스(왼쪽). 김현기 특파원

프셰미실 중앙역에 곳곳에는 "토요일인 이달 5일 오후 1시에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유대를 다지는 반전 촉구 대회에 모두 참여하자"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대학생인 이반(21)은 "우크라이나가 국제 방위군에 합류하려는 외국 시민을 위한 비자 면제 제도를 임시적으로 도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에 동참하려는 친구들도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에서 유학하다가 지난 1990년 8월 4일 남한으로 귀순한 북한 유학생 김지일씨의 딸 김연아씨. 김현기 특파원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에서 유학하다가 지난 1990년 8월 4일 남한으로 귀순한 북한 유학생 김지일씨의 딸 김연아씨. 김현기 특파원

폴란드에서 부동산 투자 비즈니스를 하는 김연아씨(33)는 만사 제쳐놓고 피란민 돕기에 나선 대표적 한국인이다. 김씨는 수도 바르샤바에서 밴 차량을 5시간 가량 몰고 와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사이 도우호비추프 국경에서 피란민 두 가족을 데리고 나와 바르샤바의 한 가정에 소개했다. 영국 임페리얼 컬리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폴란드로 건너 온 김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피란민과 폴란드 내 시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며 "30시간 기다려 폴란드 땅을 밟은 어머니와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오며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개전 이후 1주일 동안 김씨가 연결한 피란민 지원만 10건이 넘는다.

우크라이나 난민 현황.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우크라이나 난민 현황.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김씨는 김일성종합대학 수학부에서 우크라이나로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되며 '북한의 수재'로 불리다 지난 1990년 남한으로 넘어 온 김지일씨와 우크라이나 출신 발렌티나 보주코(현 고려대 교수) 사이에 태어났다. 김씨는 "북한도 러시아처럼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각자가 뭘 해야 하는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모두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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