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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왜 무리수 두냐고? 서방, 늘 예측 틀리는 이유는 딱 하나" [우크라이나전쟁 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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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출구전략 보이지 않는 전쟁" 우크라전 1년을 말하다

오는 24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두 진영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 이번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물론 세계 안보 지형을 재편하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 중앙일보는 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을 앞두고 이석배 전 주러시아 대사와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에게 이 전쟁의 ‘종착 시나리오’를 물었다. 최근까지 각국에서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본 두 대사는 공통적으로 “전쟁의 출구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오래 버티느냐의 게임”이라는 진단을 내놨다.

이석배 전 주러대사 제공

이석배 전 주러대사 제공

이석배(68) 전 주러시아 대사는 33년 간의 외교부 근무 경력 가운데 28년을 러시아 및 동구권에서 보냈다. 그가 외교부 안팎의 ‘러시아통’으로 꼽히는 배경이다. 2019년 5월 주러시아 한국 대사로 부임해 우크라이나(이하 우크라)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8월 퇴임했다. 이 전 대사는 19~21일 중앙일보와의 전화·문자 인터뷰에서 “전쟁을 전망하기 매우 조심스럽다”고 누차 강조하면서도 “이번 전쟁에서 서방식 합리주의와는 결이 다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현실적인 해법이 나올 수 있다”고 조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석배 전 주러시아 대사 인터뷰

전쟁 1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전쟁은 어떤 식으로 끝맺게 될까.
“일각에선 6.25 한국전쟁과 같은 정전 협정을 거론하는데 현재 시점에선 어렵다고 본다. 정전 협정은 교전 당사국 간 정치적 합의를 이루지 못 했을 때 제3자 혹은 국제기구가 관여해야 하는데 중량감 있는 제3국 중재자가 없다. 지금 상태로 양쪽이 전쟁을 계속 끌고 가다가 결국 우크라·서방 쪽에서 평화 협상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서방이 먼저 한계에 봉착할 거란 말인가. 
“장기적으로 볼 때 그렇단 얘기다. 우크라 국민들의 강력한 국가 수호 의지는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또 힘으로 국경을 변경하려는 러시아의 공격 행위 역시 국제사회에서 규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전쟁은 현실을 봐야 한다. 전투는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토가 초토화되고 막대한 인명 피해, 난민 수백만 명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반면 러시아는 근대 역사상 자신들의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막대한 대가도 감내하는 경향을 보였다. 푸틴은 적어도 돈바스 4개 지역에 대한 러시아 실효 지배를 인정 받을 때까지 전쟁을 고수하려 할 거다.”
4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메릴랜드 헤아거즈타운 공항에서 중국 정찰 풍선 격추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4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메릴랜드 헤아거즈타운 공항에서 중국 정찰 풍선 격추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폴란드를 방문해 “러시아는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천명했는데.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 내에서 불거지는 회의론을 잠재우기 위한 수사라고 본다. 공고한 푸틴 체제와 달리 서방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은 선거를 주기적으로 치러야 한다. 미국과 나토의 납세자(tax payer)들은 막대한 군사·재정적 지원을 인내해야 한다. 내년 대선을 치르는 미국은 벌써부터 공화당과 조야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서방에서도 러시아와 한 대륙 안에 있는 독일·프랑스는 지리적으로 떨어진 영·미와 입장이 다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최근 뮌헨안보회의에서 ‘러시아를 짓뭉개선 안 된다’고 말한 것도, 러시아가 빠진 유럽 안보 체제가 역사적으로 안정적일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서다.”
러시아는 강력한 제재를 받고 있고 전쟁 물자가 소진되고 있다.
“이번 전쟁으로 미국·유럽연합(EU)이 한국·일본 등 동맹과 단합해 초강경 제재에 들어간 건 사실이다. 러시아도 매우 어려운 상황일 거다. 그런데 무기 공급에 관한 한 한계점에 봉착한 건 서방 진영도 마찬가지다. 우크라가 하루에 소진하는 6000~7000발의 포탄은 나토 1개 회원국의 1년치 포탄 생산량과 맞먹는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러시아는 왜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나.
“항상 서방이 러시아의 행보를 예측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다. 서방식 합리주의적 접근으로 러시아를 판단해서다. 30년 가까이 러시아를 안다고 생각했던 나도 ‘푸틴이 설마 국제사회 전체를 등 돌리며 전면 침공을 단행할까’ 의심했다. 예상이 빗나갔다. 러시아란 나라의 독특한 안보관, 국민들의 인식을 봐야 한다. 러시아는 집단주의가 강하다. 개인이 국가에 용해돼 있는 나라다. 이번 전쟁으로 궁지에 몰려도 최대한 버티려 할 것으로 본다.”
내년 3월 치러질 러시아 대선에서 푸틴 체제에 균열이 일어날 가능성은? 
“러시아 국민들은 현재까진 ‘푸틴=러시아’로 인식한다. 러시아 내 비교적 독립적인 여론조사 지지율도 78~80%가 나온다. 일부 이견을 표출할 수는 있어도, 푸틴 1인 체제를 흔들거나 국민적 대규모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러시아 국민들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전후 관계를 논의한 빈 회의(1814년) 때부터 줄곧 러시아가 유럽 안보 질서를 주도해왔다고 생각한다. 강대국으로서의 러시아가 곧 국민 정체성이었다. 1991년 구소련 붕괴는 그같은 정체성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반면 이번 전쟁은 푸틴이 서방 전체를 상대로 고독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등이 우크라·러 양쪽에 종전을 압박할 가능성은.
“협상을 하려면 주고 받는 게 있어야 하는데 러시아 요구 사항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경을 변경하자는 거다. 미국이 먼저 러시아에 ‘돈바스 일부만 받고 종전하자’ 식의 얘기를 꺼낼 수는 없다. 미국은 우크라에 선례를 남겼다가, 중국이 대만에 무력을 쓴 뒤 (러시아처럼)통일을 주장하는 상황도 생각할 거다. 이래서 양측의 협상 여지가 적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러시아는 ‘나토의 동진’이 이번 전쟁의 원인이라고 항변한다.
“미국도 ‘나토의 확장이 어떻게 러시아에 위협이 되겠는가’ 하며 안일했던 측면이 있다. 과거 러시아 측 협상 기록을 보면,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지도자들은 발틱 국가 등의 나토 가입은 어느 정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지아·우크라의 합류는 얘기가 달랐다. 이 때문에 ‘폴란드 등 나토의 확장은 냉전 체제 이후 미국의 최대 전략적 실수가 될수 있다’는 우려가 이미 1990년대 말 존 미어샤이머, 조지 케넌 등 서방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서 나왔다. 나토가 동진할 경우, 러시아가 언젠가 힘을 회복하면 유럽 내 안보 질서를 힘으로 재편하려 들 거란 경고였다. 현실이 됐다.”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판도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
“러시아도 이번 사태로 잃은 것이 많다. 6.25전쟁으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해졌듯 우크라도 정체성이 확실해졌다. 서방으로 완전히 편입됐다. 유럽에선 러시아의 고립이 심화될 것이다. 전쟁을 치른 이상 상당 기간은 그 이전 관계로 돌아가기 어렵다. 러시아의 장기 발전을 위해선 유럽과의 우호 관계가 필수적인데 매우 아픈 부분이다. 무엇보다 미국의 오바마·트럼프 정부를 거치며 균열이 생겼던 유로·대서양 동맹이 다시 강화됐다. 핀란드·스웨덴도 나토에 가입하려 한다. 러시아로선 스스로 안보 딜레마를 심화한 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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