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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기업 현실 외면한 노동이사제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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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열린 '한국노총 공공노동자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참가한 조합원들이 노동이사제 쟁취 문구가 써있는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열린 '한국노총 공공노동자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참가한 조합원들이 노동이사제 쟁취 문구가 써있는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여당, 대선 앞두고 ‘이재명 공약’ 밀어붙여

독일만 있는 제도, 의견수렴 없이 입법 독주

더불어민주당이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도입을 강행할 조짐을 보여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달 24일 “여당 위원장이 방망이를 들고 있는 상임위에선 단독 처리할 수 있는 건 하자”며 주문한 ‘입법독주’가 현실화하는 양상이다. 앞서 이 후보는 지난달 22일 한국노총과 만나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도입 법안을 정기국회 내에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동이사제는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논란이 많은 제도다. 주식회사는 본질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지 특정 계층을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용어 자체가 함축하듯 기업과 고용 계약을 맺고 있는 근로자다. 노동자가 이사회에 들어와야 한다면 기업과 거래하는 고객·채권자 등도 들어와야 한다. 더구나 노동이사제는 신속한 의사결정을 방해할 수 있다. 노동자가 이사회에서 임금을 비롯한 근로조건을 주장하게 되면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기업 경쟁력을 약화할 공산이 크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역시 이사회의 본질에서 벗어난다. 기업은 성장을 통해 주주뿐 아니라 종업원과 고객 등에게도 도움을 주라는 게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다.

미국·영국 등 영미 계열 상법을 채택한 나라에서는 주식회사가 가장 보편화한 기업이고, 노동이사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현재 노동이사제를 법적으로 도입한 나라는 독일이 유일하다. 노동이사제를 채택한 다른 유럽 국가는 노사협의회를 통해 노사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더구나 독일은 주식회사가 전체 기업의 1%도 안 된다. 나머지 99%는 유한·합자·합명회사 형태의 기업이다.

독일의 제도 자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독일의 노동이사제는 감독이사회와 경영이사회로 나뉜다. 노동자는 주로 노동이사회에 들어가는데 경영이사회에 대한 감독과 인사권만 있을 뿐이지 업무 집행에 대한 의사결정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재명표 노동이사제’는 근로자가 직접 이사회에 참가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다. 노동자가 이사회에 들어오면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자리가 투쟁의 장소로 바뀌게 된다.

이런 우려 때문에 수많은 상법학자와 경제단체는 반대 목소리를 낸다. 공공을 대변해야 할 공공기관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면 국민이 손해를 볼 수 있다. 노동이사제가 공공기관에 먼저 도입되면 민간 기업으로 확산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상급 노동단체가 이를 부채질하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입법독주가 계속된다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철저한 규제를 받는 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가 노동이사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노동이사제는 기업은 물론 노동자, 고객 등 관계자들이 많은 만큼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당은 기업 현실을 외면한 채 여당 대선후보의 공약을 밀어붙이는 입법독주를 멈추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