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 집단 따돌림 피하려, 학폭 피해자가 가해자 되기도

중앙선데이

입력 2021.11.20 00:21

업데이트 2021.11.20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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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3호 27면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 두 번째 세상, 친구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

은정이네 가족은 몇 달 전 제주도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이사 후 부모는 은정이가 새로운 유치원에 잘 적응할지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아이는 매일 아침 씩씩하게 등원했다. 은정이는 평소 입체 스티커를 스케치북에 붙이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주말마다 다양한 캐릭터의 스티커와 스티커 북을 사러 돌아다니는 것이 은정이 가족의 반복적인 일상이었다. 어느 날 은정이는 스티커를 유치원에 가져가서 친구들과 함께 붙이며 놀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큰 장난감을 가져가는 것도 아니니 허락했고 그 날부터 은정이는 매일 스티커 몇 장씩을 유치원 가방에 넣고 등원했다.

학부모 참관일이 되었다. 선생님이 진행하는 율동과 노래 수업 사이에 잠시 자유놀이 시간이 있었다. 은정이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엄마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은정이가 여자 친구 2명에게 스티커를 두 장씩 주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너무 당연한 듯 받았고 그 이후 바닥에 앉아 과일 소꿉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친해지려 선물 공세, 자연스런 발달 과정

엄마는 1~2주 전부터 은정이가 부쩍 스티커를 많이 사 달라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친구들에게 주려고 가져갔던 건가?’ ‘아까 저 친구들이 은정이에게 스티커를 가져오라고 강요한 것일까?’ 엄마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원 길에 엄마는 은정이에게 물었다.

“은정아, 아까 쉬는 시간에 너랑 소꿉놀이했던 친구들 누구야?”

“응? 주희랑 세아”

“아, 주희, 세아구나. 그 아이들이 제일 친한 친구들이니?”

“응. 아니?”

“응이냐 아니야?”

“원래 성빈이랑 친했는데, 지금은 주희랑 세아하고 놀아”

“아, 그래?”

엄마는 스티커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근데 왜?”

은정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에게 물었다.

“아까 은정이가 그 친구들에게 스티커를 주길래 많이 친한가보다 싶어서 엄마가 물었지.”

“응. 우리 반 아이들이 주희 다 좋아해. 근데 내가 스티커를 주면 주희가 나랑만 놀아. 세아까지 함께.”

엄마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 주희가 은정이랑 놀아 줘서 스티커 갖다준 거였어?”

엄마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물었다.

“주희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제일 좋으니까 스티커 주고 싶어.”

은정이 엄마는 그날 밤 남편에게 부모밖에 모르던 은정이가 친구 주희를 차지하기 위해 선물 공세까지 하는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 할지 모르겠다며 당황스러운 감정을 토로했다. 그렇다고 친구 부모에게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은정이가 자발적으로 준 것이고 주희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발달하면서 친구의 존재가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최소 연령은 만 2~3세쯤이다. 그 전까지는 또래 인식이 거의 없거나 부족하고 엄마 또는 1차 양육자와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유아기 초기에는 또래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서로 어울려 놀지는 못하고 그저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 즐긴다. 유치원생이 되고 학령 전기 무렵의 아이들은 서로 협동해서 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싸우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사회화(socialization)된다. 즉,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을 배우고, 선생님에게 사랑받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인기 많은 친구의 행동을 따라가기도 한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는 주인공 니모가 또래압력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는 주인공 니모가 또래압력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은정이 사례처럼 인기 많은 친구에게 선물을 주면서 친해지길 원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는 상담을 통해 은정이의 행동이 발달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이해했다. 은정이는 주희에게 꼭 선물을 주지 않아도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술과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사회성 놀이 치료를 몇 차례 진행 후 은정이는 더는 주희에게 스티커를 갖다 주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둘은 계속 친하게 어울렸고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생이 되면 가정 이외의 집단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욱 많아진다. 친구는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된다. 같은 반 아이들 모두가 좋아하는 놀이를 하기 원하고 많은 아이가 지닌 물건을 부모에게 사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친구들이 입은 옷과 비슷한 옷을 입으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또래압력(peer pressure)이라고 부른다. 2003년 개봉했던 애니매이션 ‘니모를 찾아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자신을 늘 과잉보호하던 아빠에 대한 반항심과 또래들의 부추김에 넘어간 니모가 스쿠버 다이버에게 납치를 당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니모와 3명의 친구는 학교 체험 학습 도중 넓은 바다에 떠 있는 큰 보트를 발견하고 보트를 터치하고 오는 게임을 하기로 한다. 니모에게는 너무 큰 도전이자 두려움이었지만 친구들의 행동을 무심코 따라 하다가 큰 변을 당한다. 또래압력을 다룬 대표적 영화 장면으로 손꼽힌다.

친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시기는 10대 청소년기이다. 가까운 친구들이 하는 운동과 게임을 따라 하다 자신도 좋아하게 된다. 자신이 그리 내키지 않아도 친구들이 한다면 따라서 한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많이 사용하는 욕을 섞어 대화하기도 하며 혼자서는 절대로 하지 않는 위험한 행동을 무리 지어서는 한다. 아이들은 이런 모방 행동을 통해 또래 집단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이 친구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다 보니 또래압력의 역기능적인 현상도 적지 않다.

혼자선 못하는 위험 행동, 무리 지어 실행

초등학교 5학년 때 따돌림의 피해자로 만났던 수형이는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가 학교 폭력 가해자 되었다. “친구들이 A(피해학생)를 함께 괴롭히지 않으면 저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또 예전처럼 따돌림당할까 봐 겁이 났어요. 희한하게도 혼자서는 못하는데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A를 함부로 대하게 돼요.” 상담 과정에서 수형이가 말한 내용이다. 이처럼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아이가 가해자가 되는 사례들은 드물지 않다.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청소년들의 자해나 자살도 또래압력, 집단 동조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손목에 자해하는 친한 친구의 모습을 SNS를 통해 접한 아이가 자해에 대한 마음속 금기가 약화되면서 쉽게 따라하게 된다. 대중에게 친숙한 유명 연예인의 자살 뉴스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대상 또한 청소년들이다.

친구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만나는 두 번째 세상이다.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인 이유는 아이에게 가장 큰 세상인 ‘부모’와의 관계가 근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래관계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란 아이, 부모와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친밀한 경험을 많이 한 아이라면 친구 관계에서 건강한 가치 판단을 한다. 친구의 문제행동에도 무조건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또래를 빨리 접하게 해야 사회성이 좋아진다는 생각으로 너무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는 부모에게는 친구가 언제 아이의 눈에 들어오는지 알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부모보다 친구를 더 좋아한다며 서운해하는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그것이 무척 반가운 현상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친구라는 세상을 언제 만나고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아이는 부모로부터 잘 독립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의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 가정법률상담소 교육위원, 법무부 여성아동정책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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