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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안전기지’인 부모, 불화로 불안·공포감 줘서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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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호 27면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 가장 큰 세상, 부모

아이를 둘러싼 환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릴 때 겪은 경험의 종류가 인간의 정신건강과 관련됨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의 ‘세상’에는 부모, 가정, 학교, 사회, 국가, 세계, 기후 위기, 재난 등 모든 것이 대입될 수 있다. 아이들이 세상의 영향을 어떻게 고스란히 받는지, 아이의 눈을 통해서 본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재현이 엄마는 아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 재현이가 배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보건실에 갔는데 아무래도 집에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통증이 가라앉지를 않아서요.” 재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다. 그날은 2학기 시작 첫날이었다. 엄마는 아침에 어두운 표정으로 마지못해 현관문을 나서던 재현이를 떠올렸다. 행동도 굼떴다. 평소와는 달리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도 없었다. ‘개학 첫날이니 학교 가기도 싫겠지.’ 엄마는 단지 그렇게 생각했다.

보건실에 들어서는 엄마를 보자 재현이는 신음 소리를 더 크게 내며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재현아! 병원 가자.” 엄마는 재현이를 데리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 도착해 몇 가지 문진을 거친 후 기본 채혈검사와 복부 영상 검사들을 시행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신체적으로는 특별한 이상 소견이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등교 첫날이라 심리적인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은데요. 소아정신과 진료를 보고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엄마에게 부드럽게 제안했다.

사랑·위로 못 받은 아이 불안 증세

세상 속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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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 엄마는 표정이 복잡했고 생각이 많아 보였다. “아, 예. 다행이네요. 근데 몸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 하시니 그냥 집에 가겠습니다.” 재현이 엄마는 소아정신과 진료를 마다하고 응급실 원무과에서 퇴원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그때 응급실 어린이 구역 간호사가 다급하게 재현이 엄마를 찾았다. “어머님! 재현이가 침대에서 배가 너무 아프다며 울고불고 소리까지 지르네요. 저희가 배 좀 보자고 해도 절대 못 만지게 합니다. 이대로 퇴원하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 엄마가 마지못해 응급실에 좀더 머물기로 했다.

호출받은 소아정신과 전문의가 응급실로 내려왔다. 의사는 재현이의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재현이가 배 많이 아프구나. 오늘 개학 첫날인데 많이 힘들었겠네?” 의사는 친근한 목소리로 재현이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재현이는 같은 공간에 있는 엄마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대답을 주저했다. “엄마는 밖에 계시라고 할까?” 재현이가 끄덕였다.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아이와 의사는 단둘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재현아, 방학은 재밌게 보냈어? 오늘 정말 학교 가기 싫었겠다.” 의사의 말에 재현이는 고개를 좌우로 세게 저었다. “학교가기 싫지 않았다는거야?” “아뇨. 방학이 재밌지 않았다고요.” “아, 방학이 재미없었구나.” “재미없는 정도가 아니라 무서웠어요.” “무서웠다니, 무슨 뜻이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배가 아파 온통 인상을 찡그리던 아이의 표정이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불투명한 통유리로 비치는 엄마의 실루엣을 응시하며 말했다. “엄마가 저를 아빠한테 보낼까봐 무서워요.”

재현이 부모는 2년 전 별거에 들어가 이혼 소송 중이다. 재현이 아빠는 도박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부인이 피부관리사 일을 하며 번 돈을 몰래 가져가 도박에 날리기 일쑤였다. 도박 빚도 상당했다. 엄마는 이혼을 원했으나 아빠는 이혼에 합의하지 않아 소송이 시작된 것이다. 별거 중에도 아빠는 재현이와 엄마를 한 달에 두어 번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고성과 몸싸움이 반복됐다. 재현이는 방안에서 자는 척했지만 부모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두려움에 떨었다. 여름 방학 동안 큰 사건이 터졌다. 말다툼 끝에 아빠가 엄마를 폭행한 것이다. 처음에는 주방 식기를 던졌고 엄마의 얼굴과 가슴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재현이가 경찰에 신고했고 이후 아빠의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재현이는 엄마가 아빠에게 맞는 장면, 엄마 얼굴이 피범벅이 된 모습, 구급차에 실려가는 과정 모두를 목격했다. 재현이에게는 악몽과 같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아빠와 별거 후부터 재현이를 과도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 아이 앞에서 아빠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표현하는 일이 많았고 술을 마시며 하소연도 많이 했다. 재현이가 준비물을 빨리 안 챙기거나 방 정리를 안 하면 “너 이러면 아빠한테 보내 버릴거야”라는 말도 자주 했다. 재현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아빠한테 보낸다는 말이었다.

아이는 아빠가 싫기도 했지만 자신이 엄마랑 헤어지면 엄마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욱 컸다. 특히 엄마가 폭행당한 후 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강하게 경험했다. 엄마가 외출을 하거나 심지어 쓰레기를 버리러 잠시 집 밖에만 나가도 엄마에게 수시로 연락해서 엄마의 안위를 확인했다.

개학 일주일 전 엄마는 재현이의 방학숙제를 점검하던 중 일기 몇 개가 덜 쓰여 있자 아이에게 “이렇게 제대로 생활하지 않을 거면 아빠에게 보낸다”라고 말했다.

아이는 엄마의 말이 진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공포가 극에 달했다. 개학날이 되었다. 학교에 가긴 갔지만 수업시간 내내 자신이 학교에 있는 동안 아빠가 또 엄마를 찾아와 폭행해서 병원에 실려 갈까 봐 불안했다. 자신이 방과 후 집에 갔을 때 엄마가 떠나고 없을 것 같은 상상까지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팠다. 엄마를 당장 만나야만 했다.

엄마 돌보려는 역할전환형 애착도

세상 속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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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부모는 가장 큰 세상이자 안전기지다.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의 태도와 행동을 동일시하고 바깥 세상에서 취해야 할 사회적 행동 양식을 배우고 답습한다. 집 밖의 낯선 세상에서 겪는 긴장과 불안을 부모의 품안에서 해소하고 힘을 되찾는다. 부모라는 안전기지에서 충분히 쉬고 사랑과 위로를 받으며 치유한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세상을 탐험할 에너지와 연료를 채운다. 두세 살 어린 아이가 놀이터에서 부모가 근처에 있는 것을 확인 후 신나게 놀다가 부모가 안 보이면 더 놀지 못하고 무서워서 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모의 불화와 이혼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다. 아이 연령에 따라서 반응이 다양하다. 취학 전 유아들은 ‘내가 말을 잘 안 들어서,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부모가 싸우나? 그래서 엄마 아빠가 헤어졌나?’라며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흔하다.

학령기 아이들은 부모 중 어떤 부모와 살까에 대한 고민, 부모가 재결합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기도 한다. 재현이는 부모가 재결합하면 아빠의 폭력적 행동이 엄마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공포가 더욱 컸다. 엄마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 공포를 이용해 아이의 행동과 정서를 통제했고 재현이는 극심한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신체적 증상을 나타낸 것이다.

재현이는 엄마를 과도하게 걱정하고 돌보려는 역할전환(role-reversal) 유형의 애착을 보였다. 겉으로는 의젓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 내면에 불안과 의존 욕구가 가득하다. 짜증이나 어리광을 부리면 엄마에게 버림받을지 모르니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 주고 말 잘 듣는 아이가 된 것이다. 재현이에게 가장 큰 세상인 ‘부모’는 더는 안전기지가 아닌 불안과 긴장을 유발하는 곳이 되었다.

재현이 부모는 아이가 이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줄 몰랐으며 아이의 애정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방법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고백했다. 10년, 재현이가 부모를 떠나 독립된 개체로서 더 넓은 세상을 탐험하기까지 남은 기간이다. 다행히 안전기지를 튼튼하게 수리하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의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 가정법률상담소 교육위원, 법무부 여성아동정책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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