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으로 세금 낸다…불「기납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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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파리=배명복 특파원】그동안 일반에 미 공개된 작품을 위주로 한 피카소의 대규모 유작전이 파리에서 개최돼 세계 미술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기 납 제라는 프랑스의 독특한 상속세제도가 만들어 낸 절묘한 결과라는 점에서 미술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파리의 대표적 전시공간인 그랑발레에서 지난 15일 개막돼 내년 1월16일까지 계속될 이번 피카소 전에 전시된 작품은 회화와 데생·조각·판화·세라믹 등 총 3백79점. 피카소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프랑스인 자크린이 평소 아끼던 애장품들로 그동안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1961년 미카소와 결혼한 자크린이 1973년 91세를 일기로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남긴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상속받게 됐다.
앙드레 말로가 프랑스문화부장관으로 있던 1968년 고안해 낸 기납 제(Dation)는 이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기 납으로 번역되는 불어 다시옹(Dation)은 그때부터 기부로 번역되는 도나시옹(Donation)과는 달리「예술품을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세금납부를 대신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세무용어로 굳어지게 됐다. 말로장관이 이 제도를 만들 당시에는 상속세에 한해서만 기 납이 인정됐으나 지난 82년 증여세에 대해서까지 기납 제도가 확대됐다.
마치 말로 장관이 피카소가 죽기를 기다려 이 제도를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이 기납 제는 자크린에게 그대로 적용돼 그녀는 남편이 남긴 작품 가운데 회화 2백 점과 조각 1백58점 등을 국가에 헌납하는 것으로 상속세를 대신했다.
당시 평가금액은 12억프랑(약 1백50억 원). 이들 작품이 파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을 만드는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여전히 상당수의 피카소 작품을 보유하고 있던 자크린은 지난 86년 갑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피카소 작품은 또 한번의 상속절차를 거치게 되는데 상속자는 자크린이 전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 카트린. 카트린도 자신의 모친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속세를 납부하게 됨으로써 프랑스정부에 귀속된 피카소 작품들이 바로 이번 피카소 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정부는 문화부와 경제 부에서 각각 2명씩 4명으로 된 기납 심사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이번 피카소 전은 이 기납 심사위원회와 카트린이 선임한 법률 및 미술전문가들간에 빚어진 4년간의 밀고 당기는 협상의 결과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프랑스문화부는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이들 전시작품 가운데 일부를 피카소 미술관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데 쓰고 나머지 작품은 아직까지 한 점의 피카소 작품도 소장하고 있지 못한 21개 지방미술관에 골고루 한 점씩 나눠줄 예정이다.
결국 앙드레 말로의 기발한 아이디어 덕으로 프랑스정부는 피카소 유작 거의 대부분을 손에 넣게 된 셈.
프랑스의 기납제는 피카소 작품 이외에도 다른 귀중한 예술작품들을 국유화해 국가의 문화유산을 살찌우는 구실을 톡톡히 해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상파미술관으로 불리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마네의『풀밭 위에서의 식사』가 그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이며 파리현대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막스 에른스트나 칼더 등 현대조형예술가들의 작품들도 기 납에 의해 국가에 헌납된 작품들이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10여건씩의 기 납 신청이 접수되고 있으나 예술적·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에 한해 기 납을 허용하는 정부방침에 따라 그중 상당수는 기각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72년 이후 프랑스에서는 총1백50건 정도의 기납 신청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 50건 정도만 허용되고 나머지는 기각됐다.
국가는 귀중한 예술품을 국민의 것으로 할 수 있어서 좋고 납세자는 예술품을 국가에 기부한다는 기분으로 세금을 대신할 수 있어서 좋은 이 제도는 프랑스문화가 이뤄 낸 또 하나의 걸작이라 해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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