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분쟁 해법 "18년째 논의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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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6월 서울의 한 산부인과 병원. 양인석(33)씨는 첫 아이를 순산한 부인을 보며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건강하게 태어났던 아이는 1시간여 만에 숨졌다. 의사와 간호사 없이 산모와 신생아를 분만실에 1시간 동안 방치해 놓은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부랴부랴 대학병원으로 옮겼으나 아이를 살릴 수는 없었다.

양씨는 "대학병원 의사는 '10분만 일찍 발견했어도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며 "산부인과에서는 처음에는 책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말을 바꿨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양씨는 병원의 책임을 밝히기 위해 진료 기록 등을 확보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병원의 비협조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사의 잘못을 환자가 입증해야 하는 의료법으로 인해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의료 사고에 따른 분쟁 해결을 위한 제도 개선은 18년째 논의되고 있으나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의료 사고는 급증하고 있다. 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1999년 271건이던 의료사고 피해 접수 건수는 지난해 1100건에 육박했다.

◆ 막막한 피해자들=의료사고가 나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 16개 시.도에 의료심사조정위원회가 있으나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50여 건이 접수돼 4건이 조정됐을 뿐이다. 소비자보호원이 유일한 피해 구제 창구다.

중재가 되지 않을 경우 환자나 가족은 소송이란 고난의 길을 택해야 한다. 일반적인 소송은 6~7개월 걸리는 반면 의료소송은 평균 26개월이 걸린다. 그만큼 복잡하고 어렵다. 게다가 의료진에 잘못이 있다는 점을 입증할 책임은 모두 환자의 몫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진료 기록조차 구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허모(54)씨는 2000년 이후 5년간 12차례 관절염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발목을 절단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소송을 결심했지만 5년간 진료기록은 단 3장만 확보할 수 있었다. 의료소비자시민연대 강태언 사무총장은 "관련 정보를 병원과 의사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환자가 과실을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교통사고가 났는데 피해자에게 사고 이유를 밝히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꼴"이라고 말했다.

◆ 18년째 논의만 반복=의료사고 피해 보상을 둘러싼 제도 개선 논의는 88년 시작됐다. 94년, 97년, 98년, 2002년 등 5회에 걸쳐 관련 법안이 제출됐다. 그러나 번번이 국회 임기가 종료되면서 자동폐기됐다. 현재는 지난해 10월 열린우리당 이기우 의원이 발의한 '의료사고 예방 및 피해구제에 관한 법률'이 제출돼 있으나 1년째 본격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의료계의 반발이 거세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입증 책임을 의사가 지게 되면 방어 진료가 늘어나고, 의료사고 위험이 큰 전공을 기피하게 돼 결국 환자에게 피해가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또 "민사상 입증 책임은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 원칙"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종합법률사무소 '서로'의 서상수 변호사는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있거나 정보를 독점하는 경우에는 소송을 당하는 쪽에서 과실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행정소송이나 해고무효 소송 등이 그런 경우다. 외국에서도 환자에게 입증 책임이 있지만 의료계 내 분쟁조정 제도가 발전했거나(미국), 정부가 1차적인 책임(영국)을 지기 때문에 직접 비교가 어렵다.

최병록 서원대 교수(법학)는 "소송보다는 분쟁 조정제도를 활성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소송까지 갈 경우에는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위해 의료진이나 병원이 입증 책임을 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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