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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코드' 맞추려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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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은 반미운동을 벌이는 사회단체 중 하나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에서 여중생 사망 사건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반미시위가 벌어질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체다. 홈페이지에는 "자주 없이는 평화도, 통일도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의 자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어 단체의 성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평통사가 8월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에서 '평화영화제'를 열겠다며 장소를 빌려 달라고 경찰에 공문을 보냈다.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란 과거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다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의 바뀐 이름이다. 상식적이었다면 공문을 받은 경찰은 평통사가 굳이 경찰의 어두운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과거 대공분실에서 행사를 열겠다고 한 의도가 뭔지를 따져봤어야 했다. 평통사의 전력을 감안하면 이들이 주장하는 '평화영화'의 내용도 파악했어야 했다. 하지만 경찰은 별 생각 없이 행사가 가능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그러나 나중에 이들이 제출한 영화 목록을 보고 경찰은 당황했다. 평택 대추리에서 경찰의 '폭력진압'을 집중 부각시킨 '대추리의 전쟁'이란 다큐멘터리가 개막작품으로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 건물 안에서 경찰이 시민을 마구 때리는 영화를 틀겠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경찰은 장소 이용을 불허한다고 통보했지만 이미 평통사 측에 약점을 잡힌 꼴이 됐다.

평통사는 "경찰이 약속을 어겼다"며 연일 항의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끌려다녔다. 평통사는 급기야 25일 저녁 경찰청 앞에서 '대추리의 전쟁'을 틀겠다며 대형 스크린까지 가져왔다. 경찰은 500여 명의 의경을 동원해 공간을 봉쇄해 버리는 궁여지책을 동원해서야 겨우 영화 상영을 막을 수 있었다. 평통사로서는 '대추리의 전쟁'을 틀진 못했지만 경찰에 망신을 주자는 목적은 이룬 셈이다.

이번 해프닝은 '자주' '통일' '평화' '인권'이란 단어만 나오면 앞뒤를 따지지 않고 스스로 주눅 드는 공권력의 실상을 보여준다. 한 경찰 간부는 "정부의 코드에 맞추려고 공권력을 우습게 아는 단체에까지 편의를 제공하려다 사달이 났다"고 말했다.

이철재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