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소련 항쟁 50년 맞은 헝가리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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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반소 항쟁 50주년을 맞아 청소년들이 22일 부다페스트 시내에서 당시 시위를 재현하고 있다. [부다페스트 로이터=연합뉴스]

헝가리의 반소(反蘇)항쟁이 23일로 50주년을 맞았다. 동.서 냉전이 치열했던 1956년 소련의 압제와 공산 독재에 시달리던 헝가리 시민들이 탱크 앞에서 "자유를 달라"며 외치다 쓰러져 간 날이다.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된 반소.반공 항쟁은 소련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지금에 와서는 '소련 공산주의의 관에 처음으로 못을 박은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세기가 흐른 뒤 역사의 현장을 찾아보았다.

◆ 아물지 않은 역사의 상흔="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쏘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김춘수 시인이 쓴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헝가리 의거의 현장 부다페스트는 또다시 '혁명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스탈린식 독재권력에 질식해 있다 자유와 민주를 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시내 곳곳에서는 각종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시가지는 붉은색.흰색.녹색으로 된 헝가리 국기 모양의 장식으로 온통 뒤덮여 있다. 도시의 젖줄인 부다(다뉴브)강을 건너 시내로 들어서자 시곗바늘이 마치 50년 전으로 되돌아 간 듯하다. 당시 시위군중을 찍은 대형 사진으로 차체 바깥을 온통 도배한 '혁명전차'가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국회의사당이 있는 코슈트 러요시 광장 건너편 농민부 건물 외벽엔 아직도 총알 자국이 선명하다.

◆ 정부에 등 돌린 민심=헝가리 정부는 올해 기념 행사를 사상 최대 규모로 치렀다. 그러나 반소련 항쟁 추모 열기 속에서도 헝가리 국민은 착잡하기만 하다. 주르차니 페렌츠 총리의 하야를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되고 첨예한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르차니 총리는 "정부가 밤낮으로 거짓말만 했다.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경제 상황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자신의 발언이 담긴 녹음 테이프가 지난달 공개된 이후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 야당과 시민들은 지난달 부다페스트 방송국 점거를 시도하는 등 반소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이번 기념 행사에도 등을 돌렸다. 제1야당인 피데스(청년민주동맹) 대변인은 "주르차니 총리가 여는 기념식은 혁명 정신에 대한 공개적 도발이기에 거부한다"며 "1956년 국민은 지금처럼 정권의 거짓말에 저항했었다"고 주장했다.

56개국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행사가 열린 국회의사당 앞 한쪽 편에는 한 달 전부터 반정부 시위대가 세운 40여 개의 텐트촌이 들어섰다. 텐트를 지키던 중년여성 커티(53)는 "거짓말을 일삼은 정부에 화가 나 직장에 휴가를 내고 짐을 꾸려 시위대에 합류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주르차니 총리 측은 "시위대의 규모가 한 달 전보다 크게 줄었다"며 "국민이 개혁정책을 펴고 있는 총리의 진심을 알아주고 안정과 발전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정파별로 반소련 봉기의 의미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는 가운데 상징적 국가 수반인 쇼욤 라슬로 대통령은 23일 국민적 단합을 호소했다. 쇼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국민이 서로 다른 것을 기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56년 혁명은 하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50주년 기념일인 23일 새벽(현지시간) 경찰은 행사장 옆의 텐트촌을 강제 철거하고 시위대가 행사장에 진입하지 못하게 연행하거나 강제 해산시켰다. 시위대는 "56, 56"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내 공항으로 통하는 윌뢰이 거리 주변 등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부다페스트=유권하 특파원

◆ 헝가리 민중혁명=부다페스트 대학생들이 언론자유 보장과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것이 발단이 됐다. 헝가리 공산정권의 요청으로 소련군이 개입, 시민군에 발포하면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새 총리가 된 너지 임레는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소련군 철수와 일당제 폐지 등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소련군은 일단 시 외곽으로 후퇴했다 다시 3000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해 11월 4일 혁명을 완전 진압했다. 13일간의 무장봉기 과정에서 발생한 시위대의 사망자는 2500명, 부상자는 2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소련군은 혁명 진압 뒤 5000명을 체포했고 이 중 229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시위에 나섰던 20만 명은 해외로 도피했다.

추모소에서 만난 키스츠 요제프
소련군의 고문.착취에 10대들도 무장 투쟁나서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앞에 마련된 혁명 희생자 추모소 앞에서 만난 키스츠 요제프(63.사진)는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직도 혁명 당일의 기억이 생생하다"며 몸서리를 쳤다. 그가 13세의 나이에 겪었던 당시 혁명 상황을 들어봤다.

-혁명 당일을 기억하는가.

"두나강 건너 부다 지역에 살았다. 학교를 다녀오는 길에 총소리를 들었다. 나중에 라디오를 통해 그것이 시위대를 향한 진압군의 총격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무서워 집에 숨었다. 나는 나이가 어려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고학년이던 형은 시민군에 들어가 무장투쟁을 했다. 형 또래의 많은 청소년이 소련군에 붙잡혀 희생됐다. 다행히 형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나.

"살기가 너무 너무 어려웠다. 소련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행세했다. 그들은 허수아비 정권을 내세워 곡식을 빼앗고 주민들을 강제노동에 내몰았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던 것은 억압이었다. 소련군이 주둔하기 전까지 헝가리인은 자유를 누렸다. 그런데 소련군이 오면서 할 말도 제대로 못하게 됐다. 누리던 자유를 순식간에 빼앗긴 것이다. 반항하면 가차없이 탄압을 가했다. 소련 정권은 1947~52년 200만 명의 헝가리인에게 테러를 가하거나 구속.고문과 착취를 일삼았다. 혁명은 그동안 참았던 것이 폭발한 것이다."

-혁명 50년을 맞은 소감은.

"오늘은 현 정부 퇴진 시위에 참여하러 나왔다. 당시 혁명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공산당 간부의 손자.손녀가 집권 사회당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역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헝가리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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