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침묵 지키다 떠난 '신군부 목격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최규하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대통령 8명(내각제 윤보선 대통령 제외) 중 유일하게 비(非)권력자였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이 돼서도 마음대로 못했으며, 상황에 떠밀려 하야(下野)했다.

◆ 운명적으로 샌드위치 대통령=1979년 10월 26일 밤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을 때, 그는 국무총리였다. 그는 헌법에 따라 바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러곤 12월 6일 '체육관 선거'라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러나 권력은 진공상태였다. 진공 속으로 여러 파워가 해일처럼 들이닥쳤다.

김영삼.김대중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요구세력이 첫 번째였다. 야당.대학생.재야투쟁세력이 중심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계엄령을 해제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권력을 이양하라고 최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군부는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정점으로 버티고 있었다. 정 총장은 양김에다 김종필까지 합쳐 3김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숨기지 않았다. 더 무서운 것은 제3의 권력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보스로 하는 비밀조직 하나회 멤버들이었다. 신군부였다.

세 권력의 삼각파도 속에서 최 대통령은 무력한 샌드위치 지도자였다. 통치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행정수반이었다. 그는 세(勢)와 마땅한 권력기반이 없었다.

◆ 79년 12.12로 무력(無力) 대통령=전두환 장군의 신군부는 이날 '구(舊) 군부'와의 총격전에서 승리하고 정승화 총장을 구금했다. 최 대통령은 정 총장 연행 재가(裁可)를 거부하며 대통령의 권위를 지키려 애썼다. 국방부 장관을 불러오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정 총장은 잡혀갔다. 휘하의 장군들이 서로 전투를 벌였는데도 군 통수권자인 최 대통령은 이를 통제할 힘이 없었다.

◆ 80년 소용돌이에 휩쓸리다=그가 재임했던 10개월은 어느 때보다 격동과 위기의 시절이었다. 신군부는 통치권력을 향해 진군했다. 야당.재야.학생.교수.노동계는 신속한 민주화 이행을 요구했다. 80년 2월 29일 최규하 정부는 윤보선.김대중씨 등 재야.운동권 인사 687명을 복권시켰다.

위기는 바깥에서도 왔다. 이란 혁명 후 제2 오일쇼크로 유가가 솟구쳤다. 외교관 시절 갈고닦은 인맥을 활용해 최 대통령은 직접 석유공급선 확보를 위해 뛰었다. 5.18 광주 민주항쟁 직전까지 그는 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유 협상을 벌여야 했다. 5월 17일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했다. 권력은 전두환 장군에게 빠르게 넘어갔다. 샌드위치 최규하 대통령은 이때부터 8월 16일 하야할 때까지 허수아비처럼 지냈다.

◆ 베테랑 외교관 최규하=그는 대통령보다는 외교관으로서 큰 획을 그었다. 경성제1고보(현재 경기고)를 졸업한 그는 해방되던 해인 45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부임했으나 이듬해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옮기면서 관직을 시작했다. 그는 51년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된 이래 75년 국무총리가 되기까지 20여 년간 전문 외교관이었다. 63년엔 '혁명가 박정희'의 외교고문, 67년엔 외무장관, 71년엔 '대통령 박정희'의 외교특보였다. 그는 67년 유엔총회 수석대표를 비롯해 국제회의만 30여 회 참석할 정도로 활동이 많았다.

안팎에서 공격받던 한.일 회담과 월남전 이후 미군철수 문제를 국익에 기반해 마무리했다. 안보 공백을 막기 위한 외교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가 외교관으로서 능력과 성실함을 보여주지 못했더라면 박 대통령은 그를 총리로 4년이나 쓰지 않았을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