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 그리운 감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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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팔순을 넘기시면서 치매 증상이 심해지셨다. 부모님 모두 일을 나가셔야 하는 상황이라 도시에 사는 살림 넉넉한 큰아버지께서 할머니를 모셔가시게 됐다. 그해 방학 큰집으로 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였다. 큰어머니가 방을 나가시자 할머니는 문갑에서 다 터져 가는 홍시를 꺼내시더니 먹으라고 주시고 또 몇 개는 가방 속에 쑤셔 넣으셨다. 나는 가방에 감물 들면 안 지워진다고 짜증을 부렸지만 막무가내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외버스터미널 화장실에 감을 버리고 휴지로 감물을 닦아내며 할머니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며칠 뒤 큰엄마와 전화통화를 끝내면서 엄마는 할머니가 정말 큰일이라고 하셨다. 자꾸 문갑에 간식거리를 숨기고는 배고파 죽겠다며 난리를 피우신다는 거였다. 나 때문인가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

할머니는 큰집 온 손님들에게 여기가 어디냐, 내 집에 가야 한다며 애걸을 했다고 한다. 결국 넉 달 만에 다시 우리집으로 오셨다. 나는 학교가 파하면 뛰다시피 집으로 와선 엄마와 교대로 할머니를 지켜야 했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는 이불 속에 먹거리를 숨겨 놓았다가 내게 몰래 주시곤 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아, 이러다 이불 속에서 홍시라도 터지는 것 아닌가 늘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초가을 어느 아침, 힘이 없다며 자리에서 못 일어나시던 할머니께선 내처 먼 길을 떠나고 마셨다.

할머니 제사가 얼마 전이었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나는 또 못 가 뵈었다. 자식도 못 알아보면서 손녀딸 홍시 좋아하는 건 어찌 그리 잊지 않으셨을까. 미지근하던 문갑 속 터진 홍시 맛이 그리워진다.

김은희(40.주부.서울 대치동)

27일자 주제는 '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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