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문명 버리고 침술로 농촌봉사|단양으로 간 시인 신동문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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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싼 술 몇 잔의/주정 속에선/아니다 아니 다의 노래라도 하지만/맑은 생시의/속 깊은 슬픔은/어떻게 무엇으로/어떻게 달래나/나는 취했다/명동에서 취했다/종로에서 취했다/나는/나는/이런 것이 아니다』(「아니 다의 주정」중).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반에 걸쳐 현실 및 역사의식이 짙게 밴 참여시로 문명을 날리다 갑자기 시단에서 자취를 감춘 신동문씨(62)는 산과 물의 고향 충북 단양서 산다. 시인 신동문이 아니라「단양의 신 바이처」로 알려진 신씨는 이곳에서 사과·포도농장을 가꾸며 침으로 인술을 펴고 있다.
「남의 박수와 장단에 맞춰 시도 아닌 시를 써 가지고 유명 시인 입네 하는 내 자신에 회의를 느꼈어요. 또 아무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한 시들이나 발표해 놓고 떼지어 돌아다니며 술만 마시고 문인 티를 내는 문단에 구역질이 났습니다. 5·l6직후 시대상황에도 염증을 느꼈고요.』
1956년 시「풍선 기」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신씨는 「수정화병에 꽂힌 현대시」「조건 사」 「아니 다의 주정」등 일련의 시를 발표하며 저항시인으로 떠오르다 65년「바둑과 홍경래」를 끝으로 절필했다. 홍경래는 혁명을 일으켰는데 바둑이나 두며 아무에게도 감명을 줄 수 없는 시나 쓰고 앉아 있는 자신이 미웠기 때문이다. 『사상계』『새벽』등 종합지 편집장과『문학』『창작과 비평』등 문예지의 편집인으로서 문단 한가운데 있었던 신씨는 발표지면을 얻기 위해 눈치나 보고 아부하는 문단현실이 보기 싫어 떠나버렸다.

<「풍선 기」로 등단>
『문단 및 정치상황에 대한 염증도 이유지만 무엇보다 노동을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젊어서 결핵으로 l0여 년간 요양소를 전전하다 건강을 찾고 나니 건강한 삭신으로 뭔가 육체노동을 하고 싶더군요.』
고향이 청주인 신씨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62년. 이곳의 풍광에 매료돼 산 5만여 평을 구입, 혼자서 개간해 사과·포도농장을 일궜다.
『술도 좋아하고 해서 내 손으로 좋은 포도주도 만들어 마시고 팔기도 하겠다는 황홀한 생각에서 처음에는 포도밭을 일궜지요. 그러나 당도·일조량 등 풍토가 맞지 않아 좋은 포도주가 안 만들어지더군요. 또 농가정책에 따라 누에도 쳐보고 젖소도 30마리나 사육해 보고했으나 모두 실패했어요.』

<완쾌환자 20만 명>
농사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고 아직도 그 연장선상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신씨의 현재 주업은 침술. 혼자서 익힌 침술로 15년 전부터 부락민들을 틈틈이 치료해 온 신씨는 현재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몰려든 환자들에게 침을 놓아주느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지금까지 신씨에게 침을 맞고 완쾌된 환자는 줄잡아 20만 명. 하루 30여명의 환자들이 전국 각지서 몰려들고 있으며 단양 사람 치고 그에게 침 한번 맞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요양소를 전전하면서도 못 고친 결핵을 침을 맞고 완쾌했을 때부터 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지요. 한의학 서적 및 침술서적을 구입, 독파하면서 혼자 침술을 터득, 부락주민들에게 시술하다 보니 신통하게 들 낫고, 그 소문이 퍼져 이제 침이 내 삶의 전부가 돼 버렸어요. 농장 돌볼 틈도 없이 요.』
「노래방 침방」이라 써 붙여진 방에는 신씨가 손수 만든 병상 4개가 있다. 당뇨병·고혈압·위장병 환자 등 이 침방은 바로「종합병원」이다. 환자들은 침을 맞기 전후에 반드시 노래를 불러야 한다. 노래가 바로 시술 료다.

<시술 료는 노래로>
『한 20만 명 환자를 대하다 보니 낙진만 하면 그 사람 오장육부의 움직임이 환히 들여다보여요. 암도 손에 짚혀 지고요. 그럴 때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지요. 환자들은 노래를 부름으로 해서 침맞기 전에 고통을 잊을 수 있고 또 유쾌한 기분으로 치료를 받아야 쉽게 나을 수 있고요.』
찾아 올 때는 아픈 몸으로 오지만 그의 농장에만 들어오면 환자들은 모두 유쾌하다. 환자들 스스로가 침 소독도 하는 등 조수가 되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기도 하면서 한 가족이 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정치도, 시술 료라는 경제도 없는 환자들의 작은 천국이 신씨의 농장이다.
「일부러 문학관계 서적을 멀리합니다. 심지어 편지도 일기도 안 쓰면서 25년간 살다 보니 이제 문 치가 돼 버린 것 같습니다. 정의니 사회니 떠들지 않고 침을 놓는 행위 그 자체가 사회 한복판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뭐래 도 나는 떳떳하고 행복합니다. 내 육신이 멀쩡한 한 침과 농사에 내 몸을 바치겠습니다. 병약해 육신을 움직이지 못할 때 다시 시를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글=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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