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남편 대표작 보니 가슴 떨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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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신 감독(고 신상옥 감독)이 어젯밤 꿈에 찾아오셨어요. 몇 년 전 부산에 함께 내려와 돌아 다니던 기억이 생생한데 올해는 혼자 오게 되니까 그랬나 봐요."

고(故) 신 감독의 대표작이자 자신이 주연한 '열녀문'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원로 배우 최은희(사진)씨를 13일 오전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에서 만났다.

1962년 제작된 이 영화는 이듬해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됐었지만 필름이 사라져 그동안 국내에선 볼 수 없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대만에서 필름을 찾아낸 뒤 정교한 복원작업을 거쳐 이날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한 것이다.

"잃었던 자식을 되찾은 것처럼 가슴이 떨리고 감격스러워요. 그동안 신 감독과 많은 작품을 했지만 특별히 아끼는 영화죠. 홍콩에 원판을 수출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북한에서 가져갔더라고요. 그래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단념하고 있었죠."

'열녀문'은 양반집 맏며느리로 들어간 주인공 한씨(최은희)가 남편을 일찍 여읜 뒤 집안의 강요로 수절하면서 겪는 아픔과 한을 그린 영화.

"베를린에선 영화를 보며 우는 관객이 그렇게 많았어요. 당시 유럽에는 제2차 세계대전 과부들이 많았거든요.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과부로 수절하며 허무하게 사느냐고 하겠지만 그때는 그랬죠."

올 4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신 감독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대목에선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최씨는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우리 부부는 하루 24시간 떨어져 산 적이 없어요. 가셨어도 항상 곁에 계시는 것 같죠. 이 영화 후반부에 내가 노인 분장을 하고 나오는 데 그 분이 '당신이 영화 속 모습처럼만 곱게 늙으면 좋겠어'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요."

최씨는 성당에 다니며 종교활동에 열심이라고 최근 근황을 소개했다.

"신 감독은 가시기 전까지 근 20년 동안 칭기즈칸과 관련한 시나리오를 다듬고 또 다듬었어요. 내가 그 분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일은 이 시나리오를 영화화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글=주정완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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