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5월」을 평화롭게(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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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5월」하면 신록으로 눈부신 새 생명의 대합창이라는 자연현상을 연상하기에 앞서 우리가 걱정과 불안을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광주」에 대한 국민적 부채가 청산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겨우 「민주화운동」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도출된 이외에는 명예회복도,「배상」도,「보상」도 이뤄지지 않은채 올해로 어느덧 10주년을 맞게 된다. 그래서 이 10년동안 5월은 계속해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격정과 증오의 세월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번 5·18행사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지 않도록 합법적인 허가절차를 밟아 불상사 없이 치르기로 광주의 유관단체들이 다짐하고 있다니 일단 안도하며 기대를 갖게 한다. 10년전 광주의 5월18일은 군사통치의 종식을 요구하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의 날이었을 뿐 당초부터 폭력과 충돌이 계획됐던 것은 아닌듯 하다. 그러한 평화적 시위가 불행한 유혈항쟁으로 확대된 경위에 관해서는 여기서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은 자료와 증언들이 공개되었다.
그후 10년의 세월 속에 우리의 정치현실과 사회여건은 많은 변화와 발전을 겪게 됐다. 평가의 잣대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민주화도 상당수준 성취됐고,지금도 그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광주도 자제와 인내하는 자세로 「5월」의 뜻을 되새기려는 성숙된 모습에서 그들의 의연함과 자긍심이 더욱 돋보임을 느낀다.
5·18이 불안과 소요로 일관했던 과거를 되풀이 한다면 전국민이 염증을 느끼게 되고 5·18의미가 퇴색할 지도 모른다.
광주의 유족단체등이 5·18행사의 평화적인 집회를 다짐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보지 않음은 물론이다. 지금까지 10년동안 논의만 무성했을 뿐 무엇 하나 매듭지어진 게 없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책임자의 규명은 물론 명예회복을 위한 구체적 조처도 없다. 광주항쟁이 「폭도들의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평가가 바뀌었다면 그에 따른 응분의 명예회복 조처가 취해져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그러려면 당시에 내려졌던 모든 사법적 판결들이 재심돼 억울한 「전과자」의 오명을 벗겨줘야만 할 것이다. 이 명예회복 조치가 가장 우선해야할 치유책이라고 생각한다.
김수환추기경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광주의 상처는 가해자의 사죄와 피해자의 용서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고 한 말은 깊이 새겨봐야 한다. 피해자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원한을 풀어버리려 해도 가해자가 나서서 사죄하기는 커녕 가해자임을 인정조차 안하려는 마당에서는 피해자의 응어리만 더욱 커지고 단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죄할 주체,용서받을 대상이 분명히 나서서 이 상처를 치유하고 역사적인 교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이제 마무리될 때가 된 것 같다.
또 경계해야할 일은 재야운동단체들의 「광주」 편승이나 이용이다. 이것은 광주의 순수한 의미를 오히려 욕되게 하는 일로 배제돼야 한다. 「광주의 5월」의 참뜻을 명예롭게 수호하고 전승하기 위해서는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상징되는 모든 폭력과 불순한 이데올로기의 편승을 불식해 평화로운 5·18기념행사의 시작이 이번에 이뤄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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