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협」은 목구멍이다/우리말로 바꾼 해부학회의 개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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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언어는 의식의 상징체계다. 말과 글은 생각을 전달하는 표현방식이면서 동시에 그 말과 글이 생각을 규제하기도 하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생각이 내용이라면 말과 글은 형식이다. 물론 내용이 형식을 1차적으로 규정하지만 형식 또한 내용을 규정할 수 있다.
함부로 내뱉는 욕설ㆍ폭언ㆍ궤변이 사회를 혼란시키고 이 혼란한 언어교통이 사회의식의 통합성 보다는 무질서와 갈등을 유발시킨다. 순화된 말과 바른 우리 글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논리의 근거는 말과 글이 갖는 민족적 통합이라는 주체성의 의미 이외에도 사회적 의식의 순화와 통합이라는 또다른 의미를 지닌다.
최근 대한해부학회 용어심의위원회가 3년여의 작업끝에 완성한 『해부학용어집」은 해부학계라는 작은 전문집단의 개가일 뿐만 아니라 의학계 전체,나아가 우리 사회 모두에게 우리말ㆍ우리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환기하는 청신한 계기가 되었음을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구한말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의학이 소개되면서 초기에는 의학용어가 모두 영어로 사용되었고 일제에 들어오면서 모두 일본어로 바뀌었다가 다시 해방후 미국유학생의 급증에 따라 영어와 일본어가 지금껏 혼용되어 온 것이 우리 의학계의 현실이었다.
의사가 쓰는 처방전은 모두 환자가 알아볼 수 없는 영어로 쓰여지고 있고 의학계의 학술논문은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본어와 영어가 병기되어 전문가들간에만 통용되는 암호로만 이해될 뿐이다.
이런 언어의 엘리티즘을 벗어나 누구나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로 해부학 용어나 신체부위용어를 고쳐보자는 노력이 의료인들 스스로에 의해 제기되고 실현된 결과라는 점에서 그 성과는 더욱 값진 것이다.
구협 비배 액와 이개 치은… 등을 목구멍 콧등 겨드랑이 귓바퀴 잇몸으로 우리말화 하고 전문용어로 쓰여지는 구는 구역,구는 언덕,구는 방울로 고치기로 했다.
「구협」을 「목구멍」으로 고친다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잘못된 언어습관을 순화하고 바로 잡는 일은 곧 인간과 사회의 의식을 순화하고 바로잡는 일로 연결된다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해부학회의 이번 개정작업은 심의위원회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난해한 암호식 용어를 단순 암기하는 불필요한 수고를 덜어주는 의학 교육적 측면이 있고 그동안 습관적으로 사용해온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꾼다는 주체적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특권화ㆍ폐쇄화 되어있는 의사와 일반인간의 막힌 관계를 뚫어주는 다각적 효과를 갖는다.
우리말ㆍ우리글의 순화와 바로잡기운동이 이를 계기로해서 의학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일본어와 외래어 잔재가 깊게 깔려있는 건축ㆍ인쇄등의 전문집단,새롭게 도입되는 첨단기술분야에서도 확산되어야할 것이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 그와 같은 작업이 문화부의 정책목표에서도 제시된 바 있는 남북한 언어학자들간의 연구교류를 통해 공동으로 이뤄지는 발전적 계기가 되도록 정부가 노력해줄 것을 당부하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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