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하영선칼럼

한·미 정상회담의 역사적 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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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한 여야의 정치적 평가가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이럴수록 정말 짜증나는 것은 하루살이에 바쁜 서민들이다. 잘 먹고 잘살 수 있도록 남북 관계나 한.미 관계를 조정하라고 뽑아 놓은 정치 지도자들이 한 치 앞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고 혼전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회담의 성공을 자화자찬하는 쪽이나 회담의 실패를 비난하는 쪽이나 사태의 전개를 내다보는 안목은 오십보백보다.

6자회담에 북한을 복귀시키기 위해 합의했다는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부터 따져 보자. 내일이면 베이징 6자회담이 공동성명을 발표한 지 꼭 1년이다. '한국 외교의 승리'라는 자화자찬 속에 우리는 기대와 꿈에 부풀었었지만 결과는 오늘의 현실이다. 그리고 판을 왜 잘못 읽고 있는지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다. 무반성의 기반 위에 세워진 새 접근 방안의 미래도 어둡다. 우선 미국을 보자. 정상회담에 마주 앉아 환하게 웃는 미국 측 대표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문 닫아 걸고는 무슨 궁리를 하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미국 외교의 실세 라이스 국무장관은 7월 26일 기자들에게 솔직하게 미국 대북정책의 핵심은 북한 핵프로그램의 지원을 막기 위한 7월 15일 유엔 안보리 결의의 동력을 유지 강화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이런 희망이 중국과 한국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에 직면하면 국무부.국방부.정보기관 대신 재무부의 안보 역할을 보다 전면에 내세우게 될 것이다. 재무부의 테러리즘과 재무정보담당 차관 스튜어트 르베이는 지난주 미국기업연구소(AEI) 연설에서 9.11 테러 이후 반테러전을 위한 재무부의 새로운 안보 역할을 설명하면서, 특히 과거의 전면적 경제 봉쇄 대신 불법행위에 간여한 구체적 주인공만을 조준 겨냥하는 방식의 명분과 효율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성공 사례로 북한을 들고 있다. 미 재무부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관련 기업들과 마카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 같은 돈세탁 우려 금융기관들을 미국 및 세계 금융 경제 질서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다.

북한은 8월 28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로 미국의 금융제재 해제는 6자회담은 물론 9.19 공동성명 이행과 직결된 미국의 대조선정책 변화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라고 주장하며 북한은 "제재 모자를 쓰고는 절대로 6자회담에 나갈 수 없다"고 밝혔다. 이런 판에서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은 끼어들 빈틈을 찾기 어렵다. 북한의 전략적 선택은 우리 정부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에서 찾아 올 것이다.

다음으로 따져볼 것은 전시작전통제권을 한.미 동맹의 미래 비전에 따라 변화시키되 변화 이후의 주한미군 주둔 및 유사시 증원계획을 재확인했으므로 전작권을 둘러싼 국내 안보논쟁은 해결됐다는 정치적 평가다. 우선 '재확인' 문제를 재확인하자. 정상회담에서 전작권이 정치적으로 다뤄지지 않아야 한다는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에 노무현 대통령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역설적으로 '자주화의 종속화'를 상징하는 서막이다. 연합방위체제의 공동방위체제로의 전환은 제도화의 긴밀성을 약화시키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방의 재확인에 대해 감사의 미소를 보내야 한다. 신용카드를 자진 반납하고 제한된 자기 보유 현금과 유사시 신용대출의 불안정한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대출할 때마다 상대방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한반도 유사시의 내용이다. 전시작전지휘권을 단독 행사하게 되었으니 드디어 협력적 자주국방의 틀에서 안보도 추진하고 남북 관계도 추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소박한 꿈이다. 한반도는 지난 200년 동안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에 세계대전 성격의 한국전쟁, 지역전쟁 성격의 청일전쟁.러일전쟁 같은 대규모의 폭력 대결 속에 나라의 운명을 헤쳐 나왔다. 한반도는 유럽과 달리 21세기에도 여전히 지구, 지역, 그리고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해야 한다. 이런 유사시를 미리 막고 또 불행하게도 유사시가 발생할 경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협력적 자주국방을 넘어선 복합적 군사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따라서 전작권은 자주적 시각이 아닌 복합적 시각에서 새롭게 조정될 수밖에 없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