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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소 분쟁의 고도」에도 개방 바람 솔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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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중앙일보 외신부 안희창 기자가 한국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소련과 일본 양국간에 반환을 둘러싸고 한창 분쟁중인 사할린 남동쪽 쿠릴열도의 북방 4개 도서를 취재했다. 소련 외무부의 특별초청을 받아 이달 초 현지를 답사한 안기자는 소연방정부 외무부관리와 사할린 주정부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이제까지 베일에 싸여있던 4개 도서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현지 관계자들도 만나봤다. 세계최강의 경제대국 일본과 세계최강의 군사대국 소련이 4O여 년이 넘도록 서로 자기 영토라고 힘 겨루기를 벌여오고 있는 소위「일본 북방 4개 도서」는 구나시리 (국후)·에토로후 (택착)· 시코탄 (색단) 과 하보마이 (치무) 군도를 말한다. 이들 4개도서 중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중심이 되는 섬은 구나시리다. 면적은 1천5백평방km로 우리나라의 제주도 (1천8백20평방km) 보다 조금 작으며 인구는 7천여명. 민족은 러시아인이 주종이나 우크라이나인등 다른 민족도 많이 살고있으며 한국계로는 1명이 있다. 면적상으로는 에토로후 (3천1백39평방km) 다음이나 인구수도 가장 많고 개발도 제일 잘돼 있는 곳이다. 날씨가 춥고 바닷바람이 세 곡식재배는 하지 않고 본토에서 갖다 먹는다. 소·젖소·닭을 키워 우유·계란은 풍부한 편이며 감자·빵이 주식. 특히 연어·송어 등 생선은 그야말로 넘쳐흘러 제대로 처리할수 없을 정도다. 이곳에도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불어 관광사업을 한다, 통조림 공장을 쇄신한다는 등의 목소리가 높지만 아직은「천연」그대로의 고도라 할 수 있다. <편집자 주>
『곧 비행기가 멘델레보 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오.』사할린 남동쪽 구나시리도 상공에 이르자 정원 50명의 소련 안토노프 24 국내선 여객기에서 기내 안내방송이 나왔다.
창밖을 내다보니 구나시리섬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나면서 북태평양의 갈매기들이 바다 위를 한가롭게 선회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지난83년 KAL007기가 소련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부근이다.
지난 1월25일 서울을 떠나 동경·모스크바·사할린을 거쳐 8일 만인 지난 2월2일 오후6시, 한국기자로는 처음으로 이른바 일본의「북방4도서」중 하나인 소련령 구나시리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사할린의 유지노 사할린스크 공항을 떠난지 1시간2O분 만에 도착한 구나시리는 푸른바다에 둘러 싸인채 흰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일행은 기자를 포함, 미ABC방송기자3명· 소련기자3명·일본TBS방송의 촬영기자 1명 (소련인) 과 안내를 맡은 소련 외무부 직원 2명 및 사할린 주정부 직원 1명 등 모두11명.
기내 창문을 통해 본 멘델레보 공항의 활주로는 구멍이 군데군데 뚫린 철판을 이어 만든 것이었다.
마치 2차 대전 당시 미군이 남태평양의 섬에서 활주로를 만든 식이었다.
출입수속을 마치고 공항청사 밖으로 나오자 누군가가 기자에게 『저곳이 홋카이도』라고 말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홋카이도의 산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공항 주위는 3백60도 돌아가는 레이다, 상하로 움직이는 레이다 등 각종 레이다·안테나가 여러개 눈에 띄었으며 갖가지 복장의 군인들이 여기저기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공항에서 26km 떨어진 이 섬의 중심 마을인 유지노쿠릴스크까지는 시내버스를 탔다.
소외무부 직원 드미트리씨에게『이곳에서 가장 짧은거리로 홋카이도까지 몇km냐』고 물어보았다. 이에 드미트리씨는 자기도 여기에 처음 오기 때문에 모르겠다며 버스 앞자리에 앉은 4O대 가량의 남자에게 『한국에서 온 기자인데 이런 질문을 한다』며 물었다.
그러자 파벨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이 남자는 『한국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는 표정을 지으며『17km정도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계속 기자를 쳐다보며 차창 밖에 보이는 나무·집·해안 등에 대해 소련말로 열심히 설명 해주었다.
직업이 군인인 파벨씨는 휴가를 얻어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버스를 탄지 30여분이 지나 유지노쿠릴스크에 도착했다.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고 바람이 불어 더 추운 감이 들었다. 엄습하는 추위에 몸을 떨어보이며 마중 나온 이곳 당간부에게 현재 『기온이 얼마냐』고 물었다. 그는『영하10도밖에 안된다』며 뭐가 춥냐는 표정이었다. 짐을 푼 여관「매그노리아」는 고도라 그런지 시설은 형편없었다. 화장실·욕실도 없고 우선 분위기부터가 썰렁했다.
호텔 이라기 보다 여관이라 부르는 것이 정확한 매그노리아에서 체크인하자 구나시리 공산당 제1서기인 테레스코씨의 저녁식사 초청이 기다리고있었다.
식사는 빵·연어·고기수프 등이 푸짐하게 나왔다. 버터 이외에 고추장 맛이 나는 아지카(A-gika) 라는 소스가 있어 반갑게 빵·고기에 연달아 찍어 먹었다.
식사가 끝날 때 까지는 그런대로 견딜수 있었으나 정작 혹한의 구나시리를 제대로 경험하기 시작한 것은 여관에 돌아가서 부터였다.
방안은 창문을 꼭꼭 닫았으나 살을 에는 찬바람이 계속 창틈을 통해 들어와 실내온도는 서늘 하다기 보다 추울 정도였다. 처음엔 내복을 모두 껴입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냉기가 전신을 엄습했다. 하는 수 없어 코트를 꺼내 입고 목도리까지 걸친 채 완전무장 태세로 잠을 청해야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옆 침대에서 잠든 드미트리씨는 팬티와 러닝셔츠만 입고도 끄떡 않고 잘도 자고 있었다. 도착 다음날 3일의 일정은 문화·스포츠센터와 통조림 공장 및 이지역 신문사 방문. 구나시리 문화·스포츠센터에는 6세부터 17세 까지의 학생들을 위해 노래·춤·공작·체스·축구·복싱·유도 등 33개 과정이 준비돼 있었다.
문화 스프츠센터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 한국인 얼굴을 한 남자 한사람이 나타났다. 4O대가량의 이 방문객은 대뜸 한국어로 『안녕하십니까』 라고 인사를 건네 왔다.
공산당 제1서기 테레스코씨의 연락을 받고 왔다는 그는 자신을 김진화 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곳 구나시리에 사는 유일한 한국계 소련인 이었다. 김씨는 사할린에 살다가 85년부터 이 섬으로 옮겨와 살고있다고 했다.
김씨와 함께 이곳 유일의 신문사를 찾았다.「나루베예」 라는 이 신문의 이름은 영어로 하면 ON THE BORDER (국경에서)라는 뜻이다. 격일간으로 발행되는 이 신문은 2천8백부정도가 매일 인쇄된다고 했다.
이 신문사 회의실에서는 미리 도착한 우리 일행중 한명인 소련기자가 이 신문사의 기자6명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 지역개발을 위한 방안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것 이라고 김씨가 귀띔해주었다.
이 신문의 산업부장인 발레리 프로트니코프씨는『4개 도서가 결코 일본에게 반환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하고 『이곳은 자원이 많으니 일본이나 한국과 경제협력을 강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발전 한것은 소련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만약 이를 모르는체 하는 사람이 있으면 머저리』 라고까지 했다. 그는 『그러나 한국관계에 대한자료가 부족해 깊이 알기는 어려운 실정』 이라고 덧붙였다.
오후에는 생선 통조림을 만드는 공장을 찾았다.
책임자인 블라디미르씨는『연어·송어·명태 등 4O여 가지의 통조림을 1년에 약 1천 만개정도 소련각지에 판다』며『한국에도 수출 할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1년에 50만t의 물고기가 연안에서 잡힌다고 말하고, 이를 가공하는 등「상품화」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한 것이 문제점이 되고 있다고 시인했다.
이 통조림 공장은 복도가 삐거덕거리고 출입문도 엉성한 등「공장」이라고 하기에는 시설이 너무 빈약했다. 도착 3일째인 4일에는 온천욕이 예정됐다. 장갑차처럼 제작된 설상거를 타고 4O분 거리의 온천장에 도착했다.
설상차가 멈춘 곳은 눈이 새하얗게 깔린 벌판에 집 하나 보이지 않는 황량한 곳이었다. 이른바 온천장은 해안가 옆 야외에 벽돌로 엉성하게 쌓아올린 탕3개의 노천목욕탕이었다.
이 섬에는 이 같은 온천이 네군데 있으며 라둠·유황·미네럴이 골고루 들어있어 피부병과 허리병에 특효가 있다고 했다. 온천욕이 끝난 후에는 홋카이도가 어렴풋이 보이는 해안가에 있는 한 어부의 집을 방문했다.
비교적 규모가 큰 이 어부의 집은 가운데 넓은 홀이 있었다. 이 홀에는 침대·당구대·식탁 등이 함께 놓여져 있었다.
흑백TV에는 마라톤중계를 하는 일본TV방송이 그런대로 선명하게 나타났다. 교포 김진화씨는 이곳 방문이 끝나자 자기 집으로 가자고 초청했다.
이날 저녁은 김씨의 딸 돌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씨 집에 도착하자 김씨 부부와 이웃에 사는 소련인 들이 반갑게 맞았다.
한 부인이 『서울은 인구가 몇 명이나 되느냐』『한국이 발전했다는데 어느 정도냐』 는등 질문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소련인 들에게 혹시 소련에 사는 한국계에 대한 차별이 없느냐고 묻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알렉산더씨(36·통조림 공장 근무)가 『여기모인 우리도 민족적으로는 다 다르다』며『김씨 딸 돌잔치에 이렇게 모여 축하를 해주는 것 보면 잘 알수 있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노래와 춤으로 김씨의 딸 돌을 축하하는데 구나시리의 밤은 자정을 넘으며 눈속에 깊이 잠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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