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9월 첫 진주 그동안 네번 철군/주한미군 약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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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군작전 통제권… 「광주」 책임 논란도/공군 1만여명 포함 현재 4만3천명
한국에 미군이 주둔한 것은 2차대전에서 무조건 항복한 일본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한엔 소련이 남한엔 45년 9월8일 미 제24군단과 7함대병력을 태운 42척의 함정이 인천항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됐다.
그해 11월까지 남한의 각 지역에 배치된 미 제24군단 병력은 7만여명이었다.
당시 미군은 일제시대 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로 사용되던 용산의 군시설을 인수,주한미군과 용산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미군은 그후 48년 8월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2년11개월에 걸친 군정을 통해 자본주의에 입각한 의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주력했다.
정부수립과 함께 모든 행정권이 미군정청으로부터 한국정부에 이양됐으나 국군에 대한 지휘권만은 당시 이승만대통령과 하지주한미군사령관 사이에 체결된 「한미군사 안전잠정협정」에 의해 주한미군사령관이 계속 행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47년 11월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이듬해 6월29일까지 군사고문단 5백여명만 남긴 채 완전 철수함으로써 자동폐기됐다.
미군은 50년 6ㆍ25전쟁이 터지자 유엔군의 일원으로 다시 한국에 주둔하게 됐다.
이와 함께 그해 7월14일 이승만대통령은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장군에게 공한을 보내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이양했다.
작전권이 이양되기 2일 전인 7월12일에는 「대전협정」으로 불리는 「미국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한미협정」이 체결돼 그동안 수십차례의 조정에도 불구하고 불평등하다는 논란이 있어온 현재의 한미행정협정(SOFA) 바탕이 마련됐었다.
53년 7월27일 휴전이 되자 이대통령은 미국정부에 대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과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미군이 즉각 개입해줄 것을 요청,그해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이어 미국은 국방각료급 정례회담을 공식화했고 71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로 명칭을 바꿔 지난해까지 21차에 걸친 회의를 가졌다.
미국은 78년 11월 한미연합사령부(CFC)가 창설되면서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작전권을 통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장치가 마련됐다.
최근 논란을 빚은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측 책임문제거론도 바로 이때문에 파생되는 것이다.
주한미군은 지난 44년 동안 이번까지 포함,모두 다섯차례의 철군을 단행했다. 정부수립 직후 1차 철군에 이어 6ㆍ25가 끝난 뒤인 54년 참전미군 32만명 가운데 2개사단 7만여명만 남기고 나머지 모두를 철군했다.
71년 닉슨대통령의 괌 독트린에 따라 제7사단 2만여명이 3차로 철수했으며,77년 카터행정부에 의해 부분적으로 1천여명을 철수했다. 그러나 지난 네차례의 경우 모두 미국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던 점에서 이번 주한미군 감축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주한미군은 4만3천여명 규모로 이중 3만1천여명이 제2보병사단과 각종 전투지원부대에 배속돼 있다. 미공군은 1만1천여명,해군 및 해병대는 5백여명 정도다. 이밖에 5천2백여명의 한국군인(카투사)과 한국인용역단 3천2백여명이 미군을 간접지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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