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란과함께읽는명사들의시조] 양주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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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에 또래들을 불러놓고 국어.영어.수학.지리.역사를 가르친 열 살 소년 숙장(塾長), 러시아풍의 '루바슈카' 셔츠에 보헤미안 넥타이를 매고 직접 디자인한 구두를 신고 동경과 서울 거리를 활보하던 청년. 자칭 '국보' 무애(无涯) 양주동. 그는 한학에서 시작해 일문.불문.영문학을 거쳐 국문학 연구에 이르러, 마침내 대저(大著) '조선고가연구'를 펴낸 당대의 독보적 존재였다.

무애에겐 평생을 함께한 동갑내기 친구이자 문학적 동지가 있었으니, 그가 노산 이은상(1903~82)이다. 앞서 인용한 시조는, 노산이 32년 '노산 시조집'을 내자 그 시조집에 부치는 시조 다섯 수를 무애가 지었는데, 그 가운데 첫째와 둘째 수를 옮긴 것이다.

첫째 수는 하루 식비 40전이 궁하던 동경 유학시절, 무애가 노산의 하숙에 곁들어 지내던 이야기다. 하루 한두 끼쯤 밥 한 상을 둘이서 '갈라 먹었는데', 이 일을 주인이 알면 무료 식객을 백안시할 것은 물론 조선 유학생 체면을 상할까봐 숨기고 있던 터였다. 밥 먹는 도중에 차 날라 오는 발걸음 소리 들리면 수저를 숨기고 입안 음식을 황급히 삼킨 뒤, 밥상 멀리 열린 창을 향하여 때 아닌 한시 한 수 읊조리는 저 능청!

동갑내기가 한 방에 엎드려 단어 외우기 내기를 하며 각기 천재라 뽐내던 시절도 있었다. 시 동인지 '금성'을 내고 문명(文名)을 날리던 무애는 습작기의 노산이 시평을 청하면 핀잔주기 일쑤였다. 어느 날 노산이 시('저기 저 하늘 위에 떠 있는/구름을 무엇에다 비길까~/하늘 누에라 할까,/내가 어렸을 적 타고 놀던/강아지라 할까…'-'구름' 부분)를 내밀었다. 두보 시를 모방한 것으로 못 박고, 무애는 친구의 시고를 던져버린다. 그러나 노산이 간청하자 마지못해 읽은 끝 구절! ''오요요'부르고 싶은 마음~/그 마음 귀여울러라.'이 대목에서 무애 찬탄하여 가로되 "어디서 얻어 놨느뇨? 이제 그대를 일단 시인으로 인가하노니, 힘쓸진저". 이 사연을 담은 것이, 앞의 둘째 수다.

시조 대가들을 한마디 말로 이른 '제수'의 넷째 수에서는 무애의 혜안이 여실히 드러난다. 거기에서 무애는, 육당은 박달나무, 담원은 인절미, 가람은 난초, 여러 체(體)를 가진 노산은 '늠실 바다'라고 노래한다. 불과 한 문장 안에 수백 수천 년이 함께 들어오고 천리만리 떨어진 하방(遐方)의 사물들이 어울리는 것이다. 이 문호는 일찍이 '병인 문단 개관'(1927년)에서 시조 옹호론을 폈으며 이후 시조 7수를 지었다. 오늘 무애와 노산의 우정이 새삼 그립다.

홍성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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