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 잃은 눈(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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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눈오는 구석에 홀로 서 눈과 함께 녹아 그대 가슴에 내 모습을 새기고 싶다 눈발이 온 천지에 들 듯 부신 눈빛 마음에 들어와 이 마음의 고요를 휘젓고 가고 그리움은 갑절로 커져 빈 되살아 오는 눈 날…>(김초혜의 시 『눈』에서)
온 국민을 경악시킨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선언이 은밀하게 추진되던 날 밤,서울과 중부 일원에는 그 정치판보다도 더 은밀하게 눈이 내렸다. 그래서 때마침 후기대학입시를 치러야 하는 학부모들의 발을 동동 구르게 했고,아침 출근을 서두르는 시민들에게도 커다란 교통혼잡을 빚게 했다. 그 뿐 아니라 고속도로가 마비되고 김포공항의 활주로도 한때 막혔다.
자동차대수 1백만대를 넘어선 교통지옥 서울에 내린 눈은 이미 『그대 가슴에 내 모습을 새기고 싶은』 그런 시심을 담은 눈이 아니다. 출근길을 서둘러야 하고 또 쓸어낼 일을 걱정해야 하는 그런 귀찮고 지겨운 눈이 돼버렸다.
눈은 추운 지방이라고 해서 많이 오는 것은 아니다.
기록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비교적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다. 일본의 경우 북서부 산간지방에는 적설량 3m가 넘는 곳이 많고 최고 12m까지 내리는 곳도 있다. 가장 추운지방인 소련의 우랄산맥 부근은 평균 적설량이 70∼80㎝밖에 안된다.
이에비해 우리나라의 울릉도는 2.9m나 되고 태백산맥 줄기인 오대산,대관령,설악산과 대성산,백암산 등은 평균 2m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은 모두 6각의 결정체다. 눈이 이처럼 6각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17세기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였다. 하지만 그는 눈이 왜 6각형을 이루게 되는지 그 원인을 끝내 밝혀내지 못하고 그저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라고만 결론짓고 말았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눈이 빙정이라고 부르는 결정의 싹에서 시작된다고 밝혔다. 빙정은 불안정하여 주위의 수증기에 의해 급작스럽게 응고되고 이때 생기는 충돌이 결정을 빨리 자라게 하는데 이것을 한계안정점이라고 한다. 바로 이 한계안정점이 눈을 6각형으로 만든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는 눈을 만드는 세균을 발견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주로 식물의 잎표면에 서식하는 이 세균은 자연의 눈처럼 빙핵역할을 하는 특수단백질을 생산,주위에 얼음을 얼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은 하늘에서 내려야 운치가 있도 또 시심도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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