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영사 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민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후 고종은 늘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일본의 한 외교문서에는 당시 고종의 심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태왕(고종)께서는 민비의 횡사 후 경복궁 안에 계신 것이 매우 불안하시어 거의 취침하지 못하시고 밤을 새우는 상태였다. 이 태왕께서는 자기 신하들도 신임할 수 없어 군사고문이던 미국인 다이 장군과 선교사 모씨 등을 매일 밤 인실에 입직케 하였다. 그리고 식사 같은 것까지도 러시아 공사관 또는 미국 공사관에서 요리하여 굳게 쇠를 잠가 궁중으로 가져오게 하는 형편이었다.』
일본 외교문서의 사실여부야 어떻든 고종은 1896년2월11일 새벽 궁녀들이 타는 교자(교자)에 몸을 싣고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 나온다. 그 교자 뒤에는 몇 개의 다른 교자행렬만 따를 뿐 호위군사도 없었다. 뒤따르는 교자에는 왕세자와 엄 상궁이 타고 있었다. 영추문을 지키던 수문군들은 궁녀들의 바깥나들이로만 생각하고 일행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이 교자행렬은 곧바로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관으로 향했다. 이것이 우리 근세사에서 유명한 아관파천이다.
국왕이 외국공관에 피신한 이 사건은 열강의 틈에 끼여 신음하던 한말의 착잡한 정세를 단적으로 반영한 것이며, 동시에 한나라의 국론이 분열되고 힘이 없으면 이지경이 된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다.
이 아나사란 나라가 우리와 국경이 맞닿은 것은 불과 1백년 남짓한 역사밖에 안 된다. 1860년 중국의 천진 조약에 의해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빼앗은 뒤부터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손에 넣고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군사·무역의 근거지로 건실한 블라디보스토크가 부동항이 아니기 때문에 더 남쪽으로 진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아관파천과 그이후의 남북분단, 6·25등 일련의 역사는 바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의 희생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비극의 역사는 끝났다. 정부는 우리 나라와 소련의 영사관계를 수립, 서울과 모스크바에 각각 「영사처」를 둔다고 발표했다.
올림픽을 치르고 경제를 일으킨 우리의 국력은 93년 전의 그 악몽을 말끔히 씻어주고도 남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