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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석유 황제’ 록펠러 2세, 청 왕부 사들여 의료기관 설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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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5〉

협화의원 기공식에 참석한 록펠러 주니어(앞줄 모자 든 사람). 1917년 가을, 베이징. [사진 김명호]

협화의원 기공식에 참석한 록펠러 주니어(앞줄 모자 든 사람). 1917년 가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어느 나라건, 정부의 대외정책은 국가이익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민간활동은 다르다. 정부의 정책과 어긋나도 독립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20세기 이래 미국의 개인이나 교회, 공익재단은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의 교육, 문화, 의료 등 각 분야의 현대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1990년대 초, 상하이의 품위 있는 중국 노부인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백안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세운 학교는 서양 교육기관 취급을 받았다. 학생들은 중국문화를 이해 못 하는 미개인이라며 손가락질당했다. 사실은 다르다. 외국인 학교의 학제는 중국 정부가 제정했다. 전국에 널려있던 교회학교는 중국 전통문화와 고전수업이 중국학교보다 많았다. 양인(洋人)들이 중국 청년들을 전통과 단절시켰다는 말은 중화민국이나 국민정부의 교육정책을 몰랐기 때문이다. 중국의 명문중학과 대학은 모두 양인들, 특히 미국인이 설립했다. 문화와 의학, 교육 방면에서 중국은 미국의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록펠러 재단의 공도 빠뜨리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록펠러 가족의 자선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시카고대 같은 대학 신설하려다 #시기상조로 판단, 의학으로 선회 #처음엔 베이징 협화의학당 인수 #중 도자기 감상이 유일한 취미 #부친, 경매 나온 청 화병 다 구입

미, 20세기 들어 중 현대화에 기여

협화의원을 방문한 록펠러 일가. [사진 김명호]

협화의원을 방문한 록펠러 일가. [사진 김명호]

미국의 석유 황제 존 록펠러는 중국과 인연이 없었다. 1863년, 24세 때 중국으로 떠나는 화물선에 석유 한 통 판 것이 다였다. 외아들 존 록펠러 주니어(록펠러 2세)는 어릴 때부터 단정하고 순했다. 말수도 적었다. 웬만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부잣집 아들 특유의 괴팍한 습관도 없었다. 유일한 취미가 중국 도자기 감상이었다. 청나라 화병만 보면 넋을 잃었다. 가끔 중국과 관련 있는 종교단체를 지원했다. 1902년, 현지조사 다녀온 선교사가 통찰력 넘치는 중국 소식을 전했다. “중국에 변화가 시작됐다. 중국인들이 교육과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리훙장(李鴻章·이홍장) 사망 후 정무(政務)대신과 연병(練兵)대신을 겸한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산둥(山東)에 신식학교를 설립하고 북양군을 조직했다. 수하에 쉬스창(徐世昌·서세창)이란 명참모가 있다. 쉬의 건의로 군에 일본인 의료 전문가와 군사교관을 초빙했다. 일본인 교관은 그렇다 치더라도 군 의료기관은 중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부친의 투자로 일류대학 반열에 오른 시카고대학 총장 제이슨의 구상도 들을만했다. “중국은 교체기다. 하루빨리 시카고대학 같은 종합대학을 중국에 세워라. 그간 선교사들이 세운 교육기관의 최종 목표는 기독교 전파였다. 지금 중국은 교파와 무관한, 최고의 이상과 관용을 추구하는 대학이 절실한 시점이다.”

협화의학원 학생들의 쑨원(孫文) 추도집회. [사진 김명호]

협화의학원 학생들의 쑨원(孫文) 추도집회. [사진 김명호]

아들의 보고를 받은 록펠러는 제대로 된 조사단을 중국에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1909년 중국에서 돌아온 조사단의 보고서 내용을 소개한다. “서구의 대학들이 추구한 과학과 이성이 중국의 현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시카고대학과 유사한 형태의 종합대학은 여러 조건상 시기상조다. 의학으로 바꿀 것을 건의한다. 의학은 과학과 교육의 결합체이며 사회개조와 사상개조가 만나는 곳이다. 중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의학이라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중국은 정국이 불안한 대국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의학은 논쟁에 휘말릴 이유가 없다.”

록펠러 주니어의 청나라 도자기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1913년 3월, 금융계의 거두 존 피어먼트 모건이 세상을 떠났다. 모건은 중국 도자기의 대 수장가였다. 모건의 소장품 중 청나라 화병들이 경매에 나오자 록펠러 주니어는 부친에게 100만 달러를 빌려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청대의 도자기는 제가 돈을 주고 구입하고 싶은 유일한 물건입니다. 활짝 핀 꽃 문양 보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구입을 반대하던 록펠러는 아들의 세밀한 감수성에 감동했다. 청나라 도자기를 한 점도 남김없이 구입해 아들에게 줬다. 친구의 권유로 설립한 록펠러재단도 아들에게 넘기고 은퇴했다.

록펠러재단, 중 15개 성 88개 병원 조사

위안스카이 사후 총통을 역임한 쉬스창(왼쪽)은 록펠러 주니어(오른쪽)와 친분이 두터웠다.

위안스카이 사후 총통을 역임한 쉬스창(왼쪽)은 록펠러 주니어(오른쪽)와 친분이 두터웠다.

40세에 록펠러재단의 운영을 맡은 록펠러 주니어는 중국의 의학과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4년, 중국에 2차 조사단을 파견했다. 4개월간 중국의 15개 성(省)과 88개 병원을 둘러본 조사단은 교육과 진료를 겸한 의료기구 설립을 건의했다. 저급하더라도 당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구의 설립과, 국제 수준의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설립을 주장하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록펠러 주니어는 중국의 상황을 더 상세히 알고 싶었다. 새로운 조사단을 꾸리며 신신당부했다. “우리 재단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도 아니다. 중국은 미개한 나라가 아니다. 문화 대국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정확하게 파악해주기 바란다.” 3차 조사단의 보고서를 본 록펠러 주니어는 중국에 자선사업을 펴기로 결심했다. “고도(古都) 베이징의 중심지에 교육, 임상, 연구의 집결지를 건설해라. 재단 부설기관도 별도로 만들어라.”

당시 베이징에는 영국 성공회와 미국의 5개 교회가 합작해서 만든 협화의학당(協和醫學堂)이 있었다. 1906년 청나라 정부가 서래편작(西來扁鵲), ‘서쪽에서 온 편작’이라는 편액을 내린 병원 겸 의료요원 양성소였다. 록펠러 주니어는 협화의학당을 20만 달러에 인수했다. ‘베이징협화의학원’과 ‘부속병원 협화의원’ 간판을 내걸었다. 새로운 부지도 물색했다. 우여곡절 끝에 예친왕(豫親王)의 왕부(王府)를 통째로 사들였다. 건축은 하버드 의과대학을 설계한 쿨리지에게 맡겼다. 베이징에 온 쿨리지는 예왕부의 궁전식 건축에 놀랐다. 내부만 서구식으로 꾸미고, 외관은 중국의 고전건축 양식을 고집했다.

1917년 기공식에 참석한 록펠러 주니어는 쿨리지의 억지에 공감했다. 애초에 잡았던 건축비 100만 달러가 750만 달러로 늘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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