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위안스카이, 미국 주중공사를 고문에 앉혀 일본 견제

중앙선데이

입력 2021.07.10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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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4〉

청나라 말기 즈리(直隸)총독 위안스카이(앞줄 왼쪽 다섯째)는 미국 서적 번역에 관심이 많았다. 영어 번역관을 자주 찾았다. [사진 김명호]

청나라 말기 즈리(直隸)총독 위안스카이(앞줄 왼쪽 다섯째)는 미국 서적 번역에 관심이 많았다. 영어 번역관을 자주 찾았다. [사진 김명호]

20세기 초, 청(淸) 황실은 썩은 고목이었다. 서구열강은 중국의 주권과 황실의 보존을 담보로 이익만 챙기면 그뿐이었다. 프랑스는 서남(西南), 영국은 장시(江西)와 저장(浙江), 러시아는 둥베이(東北) 지역의 굵직한 이권을 독점했다. 미국의 중국 진출은 한발 늦었다. “다 같이 먹고 살자”며 중국에 문호개방을 요구했다. 당시 중국은 개방상태였다. 미국이 겨냥한 곳은 중국이 아닌 서구열강이었다. 열강은 자신들의 세력범위에 빗장을 걸었다. 미국의 입질을 허용하지 않았다.

윌슨, 중립 내세우며 위안 혁명 지원
정치학회장 출신 라인쉬 공사 임명

“중화민국 수립 환영” 친서도 보내
중 개방정책 깨는 일본엔 유감 성명

1차 세계대전 전승국 참석 회담서
중, 기대와 달리 일 편든 미에 실망

영·러·일 등은 새 이권 도모에 몰두

외교사절을 접견한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앞줄 왼쪽 셋째). 앞줄 오른쪽 셋째가 라인쉬. [사진 김명호]

외교사절을 접견한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앞줄 왼쪽 셋째). 앞줄 오른쪽 셋째가 라인쉬. [사진 김명호]

1911년 10월 10일, 우한(武漢) 주둔 후베이(湖北)신군이 혁명군으로 돌변했다. 혁명 기간 미국은 중립을 천명하며 뒤로는 북방의 최강자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를 지원했다. 중화민국 설립 후,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은 열강의 승인에 목을 맸다. 영국, 러시아, 일본 등은 새로운 이권 도모에 분주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열강의 반대를 무시했다. 위안이 공화정을 선포하고 국회를 구성하자 중화민국 승인을 결정했다. 중화민국 정부를 승인한다는 국서를 위안에게 전달할 특사를 파견했다. 축하 사신(私信)도 잊지 않았다. “새롭게 태어난 중국이 세계 대가정의 일원이 된 것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완벽한 공화제를 이룩한 귀국의 발전과 행복이 실현되기를 희망합니다.” 윌슨은 초대 중화민국 공사에 위스콘신대학 정치학 교수 폴 라인쉬를 임명했다. 위안은 서화(書畵)에 능한 미국 아동유학생 출신을 주미공사로 내보냈다. “미국인들이 중국 서예와 산수화를 좋아한다. 원하는 사람에게 막 써주고 그려줘라.”

위안스카이는 라인쉬가 맘에 들었다. 엉뚱한 제안을 했다. “미국의 진보주의를 대표하는, 정치학회 회장 출신이라고 들었다. 나는 선대의 통치술만 곁눈질했다. 정치학은 배운 적이 없다. 공사로 있는 동안 내 개인 고문을 해라.” 라인쉬는 어이가 없었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1915년 1월, 일본이 중국에 복잡한 요구를 했다. 담판이 벌어졌다. 일본은 중국 측에 비밀 보장을 요청했다. 라인쉬는 머리구조가 복잡한 사람이었다. 중·일담판 기간 중국주재 미국 정부 대표와 중국 총통의 고문이라는 묘한 신분을 적절히 활용했다. 미국을 의심하는 중국 외교부를 총통고문 자격으로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본국 국무부에 중국 내 반미파와 친일파의 동향도 상세히 보고했다.

중국 대표로 회담에 참석한 외교부 참사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은 위안스카이의 당부를 성실히 수행했다. 회담만 마치면 그날 상황을 라인쉬에게 상세히 설명하며 부탁했다. “미국은 중국을 위해 전면에 나선 적이 없다. 방관하지 말고 간섭해 주기 바란다.” 구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라인쉬는 시간을 벌라고 했다. 회담을 지연시키며 국제사회와 여론의 동정을 쟁취하라는 충고도 해줬다. 양보할 것과 절대 해서는 안 될 것을 이유까지 곁들여 상세히 알려줬다. 주미공사 통해 일본의 요구 사항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면 효과가 있다는 말에 우리 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라인쉬는 문화교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극 배우 매이란팡(梅蘭芳·매란방)의 미국 대도시 순회공연도 라인쉬의 조용한 극성 덕이었다. 미국 공사관에 군 막사를 신설하고 중무장한 육전대(해병대)를 주둔시킨 것도 라인쉬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미국 공사관 경내에 건설 중인 미 해병대 막사. 1918년 베이징. [사진 김명호]

미국 공사관 경내에 건설 중인 미 해병대 막사. 1918년 베이징. [사진 김명호]

2월 중순, 미국 정부가 개방정책을 파괴하는 일본에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에서 미국과 미국 국민에게 손상을 입힐, 중·일 양국이 비밀리에 체결한 약정이나, 체결을 앞둔 조약을 인정할 수 없다. 중화민국의 문호개방정책은 중국의 국제정책에 의거한 협정이나 협약에 의거해야 한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파리에서 열릴 전승국 회담을 앞둔 윌슨이 미국의 이익을 염두에 둔 발언을 했다. 비밀외교 폐지와 군비 삭감, 식민지 분쟁의 원만하고 공정한 해결 등을 주장했다. 중국의 반응은 엄청났다. “윌슨 대총통의 제안으로 세계평화가 눈앞에 다가왔다.” 11월 30일 밤, 베이징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현장을 목도한 시인이 훗날 구술을 남겼다. “미대생들이 그린 윌슨의 초상화 들고 미국 공사관으로 몰려갔다. 목이 터지도록 외쳐대는 ‘윌슨 총통 만세’ 소리에 새벽 닭도 울 엄두를 못 냈다. 그날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레닌, 미 배척 열기 휩쓴 중에 접근

전승국 일원으로 회의에 참석한 중국 대표는 상실한 주권을 회수할 기대에 부풀었다. 적어도 패전국 독일이 점거했던 산둥(山東)반도의 조차지 회수는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미국의 역할에 기대를 걸었다. 윌슨도 돕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이 독일이 산둥에서 누렸던 권익의 계승을 강하게 요구했다. 관철되지 않을 경우, 국제연맹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미국을 압박했다. 미국은 일본과 등지고 싶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와 손잡고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지지했다. 미국에 호감을 갖던 중국인들은 실망했다. 애국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0월 혁명으로 집권한 레닌은 기회포착의 고수였다. 미국배척의 열기가 중국을 휩쓸자 그 틈을 파고들었다. 제정러시아가 중국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폐기시켰다. 미국 성토에 열을 올리던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소련의 결정에 열광했다. 미국 독립전쟁을 부추긴 토머스 페인의 황당한 명언을 인용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붉은 중국을 만들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한동안 미국은 중국에서 손해를 보자 당황했다. 3년 후, 워싱턴회의에서 중국 외교관과 합세해 영국을 설득하고 일본을 압박했다.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산둥반도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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