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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의 역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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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성훈 기자 중앙일보 베이징특파원
박성훈 베이징특파원

박성훈 베이징특파원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과 ‘동사서독’에 열광했던 1990년대 초 한국엔 홍콩 문화가 꽤나 유행이었다. “사랑해요 밀키스”라며 미소 짓던 홍콩 배우 저우룬파(주윤발)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이를 대체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랑을 그대 품안에’ 같은 트렌디 드라마가 금세 그 자리를 꿰찼다. 홍콩 문화는 잊혔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중국인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한국 연예인 얘기를 꺼내는 여성들을 종종 만난다. 다들 한국 드라마는 정말 재밌다고들 한다. 현빈·손예진 주연의 ‘사랑의 불시착’ 얘기가 많다. 수입이 금지돼 있어도 알음알음 찾아보는 모양이다.

지난해 중국 최고 흥행을 기록한 드라마 ‘겨우, 서른’ 공식 포스터. [바이두 캡처]

지난해 중국 최고 흥행을 기록한 드라마 ‘겨우, 서른’ 공식 포스터. [바이두 캡처]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이 남아 있긴 하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반대로 사드 사태로 문호를 닫은 뒤 중국의 자국 콘텐트 시장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겨우, 서른(三十而已)’은 중국 드라마가 ‘느끼하다’는 고정관념을 한 방에 깨버린 웰메이드 ‘작품’이었다. 성공, 가정, 사랑을 추구하는 상하이 세 여성의 삶을 교차시킨 드라마는 현재 중국 30대 남녀의 고민과 현실을 날카롭게 담아내며 지난해 최고 히트작이 됐다. 과장된 연기는 사라졌고 영화를 보는 듯 다양한 각도의 컷 분할과 매끄러운 편집이 몰입도를 높였다. 제작사인 상하이 링멍픽쳐스는 ‘수퍼콘텐트로 신대중과 접속한다’는 모토를 가진 중국 최대 제작사다.

고품질 드라마는 한국의 문턱을 넘었다. 넷플릭스가 판권을 사들여 방영을 시작하자 국내 시청자들의 호평과 함께 ‘중드’ 열풍을 일으켰다. 과거에 볼 수 없던, 중국 드라마의 판권을 사들여 제작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지난 2월 종영한 tvN 드라마 ‘철인왕후’는 2015년 베이징 르영 픽쳐스의 웹드라마 ‘세자빈승직기’의 리메이크 판이다.

예능 프로그램도 달라졌다. 과거 ‘런닝맨’ ‘아빠 어디가’ 등 한국 예능을 벤치마킹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새로운 포맷을 선보이고 있다. 망고TV가 제작한 30세 이상 과거 걸그룹 멤버들의 서바이벌 예능 ‘승풍파랑적저저(乘风破浪的姐姐·sisters who make waves)’가 대표적이다. 중국 애니메이션 ‘디어스쿼드’(deer squad·사슴분대)는 미국 어린이TV 니켈로디언(Nickelodeon)에서 첫 방영을 시작했다.

다만 중국 영화는 제자리다. 2019년 최대 흥행작 ‘유랑지구’는 중국에서 44억 위안(6억7150만 달러)을 벌었지만 북미 개봉에선 530만 달러에 그쳤다. ‘국뽕’의 스멜이 여전한 탓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박성훈 베이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