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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난무하는 ‘정글’이 된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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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걸으면서 통화하거나 팟캐스트 듣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이젠 워싱턴 DC 시내를 걸을 때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주위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다. 이어폰을 끼면 내 뒤에 사람이 있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그의 발걸음이 갑작스레 빨라지지는 않는지 알 수 없다. 미국에서 아시아계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늘면서 새로 생긴 습관이다. 한적한 곳에서 사람과 마주치면 감시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주변을 둘러본다.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영상이 있으면 사건을 공론화하고 범인을 검거할 확률이 높아진다. 영상이 주는 잔상은 강렬하다. 화면 속 아시아계 노인이나 여성은 불시에 공격을 당한다. 괴한은 뒤에서 덮치기도 하지만 대범하게 정면에서 주먹을 날리기도 한다. 소셜미디어에는 거리에서 더 이상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아시아계 여성의 고백을 흔히 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와 뉴욕·뉴저지에서는 아시아계 노인이 외출할 때 젊은이들이 에스코트하는 자원봉사도 생겼다.

지난 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아시아계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UPI=연합뉴스]

지난 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아시아계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UPI=연합뉴스]

묻지 마 폭행이 주는 공포감은 딱히 예방법이 없고 누구나, 아무 때나 당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피해자는 주로 아시아계 노인이나 중장년, 여성으로 보고된다. 아시아계 중에서도 취약 계층이다. 가해자에 대한 정밀 통계는 없다. 주로 흑인이 아시아계를 공격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지난달 애틀랜타 총기 난사범은 21세 백인 남성이고, 지난해 샌프란시스코에서 휠체어에 앉은 84세 노인을 공중 부양해 양발 차기로 넘어뜨린 23세 남성은 히스패닉이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경찰의 증오 범죄 수사를 강화하고, 부처 간 조율을 담당하는 자리를 신설하는 등 대책을 발표했다. 의회도 혐오 범죄를 규탄하는 입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른 시일 안에 가시적인 해법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우선, 미국 내 전국적인 여론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일부 언론이 다루고 있지만, 미국보다 한국 언론이 더 크게 보도하는 실정이다.

지난해 인종 차별 문제를 제기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백인 경찰의 잔인한 공권력 남용에 전 세계가 분노했다. 공권력 남용이라는 공공의 적에 맞서 뭉쳤다. 최근 아시아계에 대한 범죄는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개인에 의한 공격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애틀랜타 총기 난사범은 자칭 “성 중독”과 극단적 종교에 빠졌고, 맨해튼에서 필리핀계 여성에게 발길질을 퍼부은 흑인 남성은 모친 살해 혐의로 17년간 복역한 노숙자였다. 육체적 강자가 지배하는 ‘정글’이라는 오명을 쓰기 전에 바이든 행정부가 진지하게 나서야 한다. 정치적 계산은 일단 접어두고.

박현영 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