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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탄소중립에 적폐로 낙인" 규제산업 찍힌 정유사의 한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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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규모의 석유화학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의 모습. 2050 탄소중립 선언의 충격이 정유사를 흔들고 있다. 사진 여수시청

국내 최대 규모의 석유화학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의 모습. 2050 탄소중립 선언의 충격이 정유사를 흔들고 있다. 사진 여수시청

2050 탄소중립 선언의 충격이 정유사를 흔들고 있다. 국내 정유 4사는 겉으론 말을 아끼고 있지만 속내는 다르다.
산업계와 상의 없이 나온 일방통행식 정책 발표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 “기간산업이라 치켜세우던 정부가 나서 정유 산업을 적폐로 낙인찍었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탄소중립은 우리나라가 선도국가로 도약할 기회”라며 2050 탄소중립 실현에 정부의 정책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발표했다.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배출량-흡수량)을 제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규제산업으로 정부 정책에 민감한 정유사가 불만을 쏟아내는 건 이례적이다. 그만큼 정부가 제시한 탄소중립 목표치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탄소중립이란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정유사가 잘 알고 있고 거스르고 싶지도 않지만, 정부가 제시한 2050년 탄소중립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이는 국내 정유사가 내놓은 탄소배출량 감축 목표치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난 9월 국내 정유사 최초로 탄소감축 목표를 제시한 현대오일뱅크가 대표적이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678만t에 달했던 탄소배출량을 2050년 499만t으로 줄이겠다고 감축 목표치를 제시했다. 2050년까지 현재의 70% 수준으로 탄소배출량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 발표로 감축 목표치를 새롭게 내놔야 할 상황이다. 다른 정유사도 사정은 비슷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후 청와대 본관 집무실에서 ‘2050 대한민국 탄소중립 비전’을 선언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후 청와대 본관 집무실에서 ‘2050 대한민국 탄소중립 비전’을 선언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석유제품 수출 비중 높아 탄소중립 성급해" 

문 대통령의 탄소중립 선언이 성급했다는 지적도 재계에서 나온다. 석유제품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2%에 이를 정도로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경유 수출액은 153억 달러(16조9400억원)로 전체 수출 품목 순위(수출액 기준)에서 4위를 기록했다. 대표적인 석유제품인 제트연료유(88억 달러)와 자동차휘발유(64억 달러)도 각각 9위, 12위에 올랐다. 반도체와 자동차에 이어 석유제품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시할 수 없단 수준이란 의미다. 석유협회 관계자는 “국내 정유사의 정제 시설 규모는 세계 5위를 차지할 정도로 경쟁력이 있다”며 “석유제품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만큼 탄소중립 목표치만 무턱대고 내세우지 말고 수출 경쟁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산유국인 미국이나 대체 에너지원이 풍부한 유럽식 탄소중립이 아닌 한국만의 탄소중립 모델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2050 탄소제로’로 가는 길.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2050 탄소제로’로 가는 길.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국회엔 정유사 타깃 규제 법안 

코로나19로 올해 조(兆) 단위 적자를 기록 중인 정유사는 안팎으로 가시밭길이다. 국회엔 정유사를 타깃으로 한 규제 법안이 쌓여 있다. 석유를 1L 생산할 때마다 지방세를 1원씩 부과하는 지방세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이 법안은 올해 6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돼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코로나로 엎어져 있는 상황에서 뒤통수까지 때리는 격”이라고 말했다. 경유에 부과하는 세금을 휘발유 수준으로 높이는 방안도 국가기후환경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다. 국가기후환경회의는 지난해 출범한 대통령 직속 범국가기구다. 현재 경유세는 1L 당 530원으로 휘발유세(1L당 746원)보다 낮다.

에너지 전문가는 정부의 지원이 없이는 정유사의 탄소중립 달성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현 정유 산업에서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해선 정유공장 문을 닫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며 “저비용에 탄소를 포집할 수 있는 기술을 정부가 개발해 민간에 제공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석유제품에서 걷고 있는 유류세 20조원이 정유 산업 전환에는 쓰이지 않고 있다”며 “정부가 이를 활용해 탄소중립 기술을 개발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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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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