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해외 한달 살기 ‘방학’ 중에 쓰는 여행 반성문

중앙일보

입력 2020.11.08 11:00

업데이트 2020.11.09 09:01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81)

노트북에서 작년 이맘때 찍은 유럽여행 사진을 찾아본다. 찍으면서도 나중에 다시 보게 될까 싶던 수천장의 사진이다. 추억에 젖어 그것을 열어볼 줄 몰랐다. 단풍으로 물든 가을은 어디나 아름답구나! 단풍 숲 한가운데서 넋 놓던 기억이 살아난다.

마음 편히 여행할 수 없어 답답하다. 정부 부처의 한 장관은 국민에게 해외여행 자제를 호소하고 그 남편은 공항에서 카메라에 대고 해외여행 간다고 당당히 말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해외여행은커녕 주말에 찍은 코스모스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여행이 설레는 이유는 흔치 않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복될수록 처음의 신선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행에 관한 소신과 목적을 확실히 해야 한다. [사진 박헌정]

여행이 설레는 이유는 흔치 않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복될수록 처음의 신선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행에 관한 소신과 목적을 확실히 해야 한다. [사진 박헌정]

거리 두기가 1단계로 완화되었지만 코로나 상황이 호전된 게 아닌,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기에 우리는 여전히 갇힌 일상 속에서 스트레스 받고 있다. 가까운 곳 나들이, 왁자지껄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모임, 소리치며 빠져드는 스포츠나 공연 현장…. 이렇게 그립고 소중할지 몰랐다.

특히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다. “바이러스를 실어나르려고?”, “먹고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팔자 좋다” 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여행업계는 완전히 폭탄 맞은 꼴이 되었고, 해외여행 좋아하던 사람도 무척 힘들다.

나도 맥 풀린 상황이다. 직장생활에서 해방되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해외 생활을 체험해보겠다는 꿈을 실천에 옮긴 지 4년째. 주거비용을 줄인 돈으로 아내와 일 년에 한 달씩 해외에서 지내다 오고 있다. 작년부터는 그 경험담을 들려달라며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길래, 좋은 아이템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인생 2막을 투자할만한 콘텐트로 준비하던 중 코로나가 닥쳤다. 예정된 강연은 다 취소되었고, 상황이 조금 안정돼 다른 강연은 조심스레 재개될 때도 여행 이야기만은 금기였다. 결국 피우지 못한 꿈이 되려나 보다.

처음에는 낯선 곳의 다양한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때로는 유명하고 떠들썩한 곳에 관심이 쏠리기도 한다. 애초의 여행목적을 지키기 위해 적당한 균형이 필요하다. [사진 박헌정]

처음에는 낯선 곳의 다양한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때로는 유명하고 떠들썩한 곳에 관심이 쏠리기도 한다. 애초의 여행목적을 지키기 위해 적당한 균형이 필요하다. [사진 박헌정]

여행을 가지는 못해도 ‘랜선 여행’으로 해외 분위기를 느껴보고, 비행기로 하늘을 돌며 여행 기분 내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한다지만 여행 본연의 느낌과 행복감을 채워주기에는 어림도 없다. 세상이 차단되고 멈추었으니 흥미로운 소식이 있을 리 없다. TV나 인터넷에는 다른 나라에 관한 싱싱한 콘텐츠는 없고 재탕 삼탕에 추억담뿐이고, 해외 뉴스도 재미없다. ‘쇄국’ 상태가 이런가 싶기도 하다.

그럼 이제 일상에서 해외여행은 아예 잊고 살아야 할까? 당분간 힘들겠지만 나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예전 사진을 다시 꺼내 보듯이 지금까지의 여행을 찬찬히 되돌아볼 시간이 주어졌으니 이 상황을 ‘방학’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래서 요즘은 그동안의 여행을 복기하고 때로는 반성도 하는 중이다. 그동안 나의 여행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허둥지둥’이었다. 해외에서의 한 달은 여행으로서는 최대 기간이고 생활로서는 최소 기간이다. 하지만 마음의 중심을 못 잡고 욕심부리면 부족한 시간이고, 지향하는 바 없이 눈요기나 하며 지내기에는 지루한 시간이다.

그리고 여유 있고 자유롭게 낯선 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즐겁고 설레는 일이지만 우리 세대에게 해외 자유여행이 쉽지만은 않다. 낯선 곳에서의 한 달 생활은 짧은 기간에 집중하는 여행과 달라, 아무리 충실히 준비해도 돌발변수가 있고 크고 작은 사건이 생기는데, 어떻게든 그걸 해결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때로는 여행사의 단체여행이 그립기도 하다.

‘해외 한 달 살기’는 인생 2막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출발 두어 달 전부터 많은 준비를 시작한다. 현지 여행도 중요하지만, 자료집을 만드는 과정도 재미있고 많은 공부가 된다. [사진 박헌정]

‘해외 한 달 살기’는 인생 2막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출발 두어 달 전부터 많은 준비를 시작한다. 현지 여행도 중요하지만, 자료집을 만드는 과정도 재미있고 많은 공부가 된다. [사진 박헌정]

모든 것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경험이 거듭될수록 외국 체험에 대한 갈증은 풀리지만 초심 역시 점점 흔들린다. 애초에 여행목적은 다른 세계의 다양한 삶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고, 무미건조한 일상의 틀에서 무감각하게 살아온 내 모습을 벗겨내고 낯선 곳의 서늘한 긴장감을 느껴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루하고 반복적인 관광에 빠져들곤 한다. 느낌이 있는 곳보다 유명한 곳을 먼저 찾고, 때론 마음에 담는 대신 바쁘게 사진만 찍어대니, 처음의 소박한 계획은 뒷전으로 밀리곤 했다.

나를 비롯해 자유 여행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마치 무슨 사명이라도 띤 듯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곳, 낯선 곳’으로 돌아다니고, 때로는 “거긴 한국 사람이 거의 없다”라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늘어놓는다. 좋은 느낌과 추억을 굳이 경력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런 ‘허세’를 나 자신에게서도 발견했다.

그래서 요즘은 여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있다. 대체 누구 좋으라고 하는 여행인가. 나한테 좋아야 한다. 언제부턴가 여행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물건처럼 대량 공급과 소비가 이루어지고 우리는 1회용품처럼 여행을 과잉 소비하면서 그 가치를 잊어가고 있었다. 여행에서 점점 ‘설렘’이 빠져나간다.

나의 ‘해외 한 달 살기’는 코로나19를 맞아 중단한 상태다. 내 경험을 통해 5060세대의 해외 자유여행을 돕겠다는 계획은 당분간 보류하고, 그동안 우리 부부가 했던 여행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있다. [사진 박헌정]

나의 ‘해외 한 달 살기’는 코로나19를 맞아 중단한 상태다. 내 경험을 통해 5060세대의 해외 자유여행을 돕겠다는 계획은 당분간 보류하고, 그동안 우리 부부가 했던 여행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있다. [사진 박헌정]

이번에 코로나19 때문에 여행을 중단하고 보니 여행은 얼마 안 되는 나의 자산과 신중하게 교환한 소중한 ‘경험자산’이었음을 깨닫는다. 인생 1막의 직업 생활을 끝낸 입장에서는 건강한 몸으로 여행할 기회도 많이 남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다시 여행을 소중히 여기고 어린아이의 눈처럼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싶다. 내가 여행을 왜 하는지,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 항상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답답함을 우리 모두 느낀다. 그러나 어차피 가기 힘들다. 이러다가 코로나가 물러나고 국경이 열리면 아마 여행 환경도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아무 변화 없이 다시 물밀 듯 달려나갈 것인가. 이제 지금까지의 여행을 찬찬히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여행을 할지 생각하면서 신발 끈을 다시 묶어야겠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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